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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동산(Vishnydvy Sad:1904)

2013.07.23 20:28

이규 조회 수:3067

  해설
  러시아의 문호 체호프가 사망하기 1년 전에 탈고한 4막으로 구성된 희곡이다.
극작가 체호프로서는 마지막 작품인 만큼 심오한 인생 관조의 눈 날카로운 현실
분석과 천재적인 두뇌로 특징 되는 극작 수법 마디마디의 배역을 표현하는 묘사의
기도 등 그의 예술을 구성하는 온갖 요소가 원숙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만년에 이르러 모스크바 예술좌의 여배우 크닛벨과 결혼함으로써 관계가
깊어지게 된 모스크바 예술좌 배우들의 간청에 의하여 병 중에도 2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초연은 1905년 1월 17일 작가의 명명일을 택하여 모스크바 예술좌에서
열었다. 주연은 그의 아내이며 예술좌인 배우인 올가 크닛벨이었다. 그 무대에서 작가는
축사를 받았다. 이날은 막간에 화려한 축제를 열어 병을 앓는 체호프는 권고에 못 이겨
자리에 참석했는데 그대로 비장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성대한 식장 여러 축사와 연설
그 사이에 할쑥한 체호프가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앉으시오. 앉으시오...
안톤 파블로비치를 앉게 하시오!" 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 모든 사람의 머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것이었다. 과연 체호프는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7월 독일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이 성대한 축제는 사실상 체호프의 세상에 대한 고별식이 되었다.
  "벚꽃 동산"은 그 집필에서 완성까지 전례없이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것을
상연하는 데도 무대 감독 및 배우들과의 사이에 맹렬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 병든
몸으로 마음이 약해져 있던 작가는 이러한 충돌을 견디어 낼 수가 없어서 희곡을
극장에 내 줄 때에는 3천 루블에 사가서 맘대로 해 달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규에도 상연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후 10년 동안 처음 작가가
요구한 3천 루블의 10배인 3만 루블 이상을 작가 측에 가져 왔다고 한다
  작품은 어떤 고장 제일의 명소라고 하는 벚꽃 동산을 배경으로 19세기 말엽 농노
해방에 따르는 귀족 계급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대의 움직임을 평범한 일상 생활을 매개로
뚜렷이 부각해 놓은 것이다. 벚나무로 유명한 주택지는 소유자인 미망인 라네프스카야
의 인정 많고 돈을 아낄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몇 겹으로 저당 잡혀 있었다. 집안
사람들은 귀족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계속하여 땅은 이전의
농노였던 자본가 로파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어 벚나무는 도끼에 찍혀 넘어진다.
  극의 형식은 이른바 정극 또는 기분극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독창적인 수법을 쓰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세상 이야기 단편적인 철학적 추상론 내용 없는 익살 거의
무의미해 보이는 감탄사만으로 극이 진행되어 충격적이고 결정적인 효과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해 모호한 분위기에서 생활의 실상이 상징적으로 떠오르게 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주의의 예술이며 훌륭한 음악의 기능을 지니는 상징극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약전
  체호프는 1860년 1월 17일 흑해에 면한 남러시아의 항구 도시 타간로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는 돈으로 자유를 산 농노였고 아버지는 이미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항구에서 조그마한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교육받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네 아들에게는 힘닿는 대로 교육을 받게 하였다.
  소년 시절에는 가정이 몹시 가난하였으므로 체호프는 이 곳의 하층 사회
소상인 농부 뱃사람들 틈에서 지냈다. 교육은 그 지방의 중학교에서 받고 그 후
온 집안이 모스크바로 나와 그는 1879년에 의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1881년의
대기근과 그에 이은 1892년의 콜레라가 만연할 때에는 자진하여 이들의 구제
운동에 힘썼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에게 세상의 실상을 파악하고 많은 사람들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갈 때 왜 의과를 선택하였던가는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 선택이 나중에 그의 문학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그의 문학 활동은
대학에 다닐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19세기부터 익명으로 단편적인 소품을 신문
잡지에 발표하여 그 고료로 가계를 도우면서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과로와 영양 부족으로 건강을 헤쳐 그의 죽음을 빠르게 하였다고 한다. 졸업하자
의학사의 칭호를 얻었으나 개업하지 않고 1년 동안 어느 병원에 의사로서
근무하고 문학에 정진하기 위해 다시 의사 노릇을 하지 않았다. 후에 시골에
칩거할 무렵 병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들을 보기가 딱해서 봐 준 일은 있다.
  1885년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고 수도의 문학자들과 사귀게 되어 많은 자극을
받았으며 특히 노작가 그리고로비치로부터 재능의 낭비를 충고한 격려의 편지를
받고 겨우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자각하게 되었다. 1888년에 단편집 "황혼에"로
푸슈킨 상을 탔다. 1892년에 그는 그의 건강을 몹시 상하게 한 사할린 여행을
하였다. 그 당시는 횡단 철도 개통 전이라 마차와 썰매 외에는 교통편이 없는
시베리아를 거쳐 황량한 지방을 2개월 간 여행하면서 그 곳의 감옥 제도와
죄수들의 생활을 조사하였다. 그 후 배로 인도양을 거쳐 귀국하였는데 "사할린
기행", "유형지에서", "구세유프" 등이 이 여행 체험에서 얻은 것이다.
  1892년에는 모스크바 부근의 세르푸호프군에 조그마한 영지를 얻어 창작
생활에 들어갔으며 농민들과의 사이에도 따듯한 관계가 맺어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체호프는 그 당시 불치의 병이었던 폐결핵이 발병하여 남쪽 크리미아의
얄타 해변가로 옮겼다. 건강이 좋을 때 한해서 그의 희곡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모스크바 예술좌를 방문하였다.
  1898년의 '드레퓌스'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그의 재능의 최초의 발견자였던 스볼린과의 우의를 끊었다.
  1900년 학사원의 명예 회원으로 추천받게 되었으나 친구 고리키가 회원
명부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을 알자 즉시 사절장을 보내어 탈퇴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1904년 병세가 악화되어 독일의 요양지 바덴베르로 옮겼는데 한 달
후인 7월 2일 마흔네 살의 장년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모스크바에서
거행되었다.
  체호프의 작품은 무려 300편이 넘는다. 장편 소설이 특징인 러시아 문학계에서
체호프는 거의 유일한 단편 작가이며 단편의 형식과 취재에서 이룬 그의 공적은
그에게 '러시아의 모파상'이라는 칭호를 받게 했다. 극작에서 새로운 수법인
기분극의 창출은 세계 문학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투르게네프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체호프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톨스토이는
'보옥같이 순수한 러시아인의 작가'로서 사랑하였고 "이 진주 같은 작품을 보라.
나는 마침내 그를 따를 수 없다"고 절찬했었다.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작가들
사이에도 찾기 힘든 아름답고 정다운 것이었다.
  체호프의 초기 작품은 순수한 웃음을 노린 경쾌한 소품과 사회 풍자적인
색채가 짙은 우울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초기 작품의 대부분이 소품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었는데 체호프는 당시의 유명 작품의 관습에 따라 하급 관리 상인
교사 배우 화가 등 도시의 소시민충에 속하는 인물을 경쾌한 필치로
희화함으로써 작가의 천재적인 재능을 여지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둘째
계열에 속하는 것은 독특한 유머에다 비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이른바 '체호프의
우수의 세계'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그들 작품 대부분의 비굴한 소시민적
근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권력층에 대한 신랄한 항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특히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러나 체호프는 이같이 안일한 예수와
유머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19세기 말엽 농노 해방의 뒤를 이어 계속된
정쟁으로 인하여 러시아의 지식 계급은 염세주의로 흐르고 사회 전체는 태만과
암흑 속에 허덕이게 되었을 때 그의 칼날같이 예민한 직감력은 사회의 온갖 부정
부패 허의 모독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약 천 편의 소설 1막 물 6편 극작 5편이 있으나 주요한
것으로는 "맛없는 이야기", "아내", "결투", "이바노프", "귀여운 여인", "세 자매",
"6호 병실", "바냐 아저씨", "갈매기", "기념제", "곰", "벚꽃 동산"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