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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Voskesenie:1899)

2013.07.21 16:43

이규 조회 수:3224

해설
  "부활"은 톨스토이가 70세에 쓴 그의 마지막 장편 소설로 인류 문학사에 영원한
기념비라고 할 만한 걸작이다
  특히 "부활"은 톨스톨이가 열중하였던 인도주의적인 사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발표되자 국내외에 비상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하여 제정 러시아의 사회 생활 특히 그 어두운 면을
기탄없이 폭로하여 불완전한 사회 제도에서 신음하고 있는 러시아 국민들의 이상을
향한 몸부림과 양심의 뉘우침 자유 해방에 대한 열렬한 부르짖음으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작품은 폭풍이 다가오기 전의 어둡고 광포한 분위기를 묘사하여
러시아 혁명을 암시한 듯하다. 작품 속의 많은 인물은 실재 인물을 모델로 취했는데
검열에서 형편없이 손상 당했으며 당시 러시아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부활"의 완본은 혁명 직후인 1918년 러시아의 '보드나르스키'의 원작
부흥판으로 간행되었다
  "부활"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더불어 톨스토이의 3대 작품으로 꼽히고
있으며 내용의 함축성에서 두 작품을 능가한다고 평가된다. "부활"은 예술성으로
우수할 뿐더러 톨스토이의 생애에 걸친 사상이 이 작품 안에 구현 응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예술적 성서이다. "전쟁과 평화"가 그의 성숙기를
장식하였다면 "부활"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다"
  로맹롤랑이 "부활"을 두고 이렇게 찬사한 것은 유명하다
  크로포트킨도 그의 저서 "러시아 문학사"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만약 톨스토이가 "부활"이외에 아무것도 안 썼다. 해도 대작가로서 인정받을 만큼
이 작품의 예술성은 높다"
  그의 소설은 예술 소설의 정도를 걷는 주제와 소재로 일관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은 이야기의 흥미진진한 진행에 있지 않다. "부활"을 읽는 재미는 각 부분의 생활
심리 인물 사건 묘사에 있다. 그 중에도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생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죄수 면회소의 광경에 대한 묘사는 정부와 교회를 전율시켜 검열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감옥 안에서 행해지는 종교 의식의 무의미를 그려 냈기 때문에 작가는
"부활" 출판 후 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했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구상 과정에서 몇
차례나 감옥을 견학하기 원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아 감옥의 관리와 사귀어 감옥 내부의
사정을 들었다고 한다.
  작품에서 진실하고 생생한 인물은 카츄사인데 네흐류도프의 자유를 속박하지 않기
위해 그의 구혼을 물리치고 심손과 결혼하는 결단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열차의 창을 두드리는 젊은 날의 카츄사와 대비되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비극적인 인물형인 것이다. 네흐류도프는 작가의 분신으로 '올바른
인간이 유일하게 살 곳은 감옥', '내가 미쳤는가 사회가 미쳤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작가 자신이 투사된 인물이다. 작가는 네흐류도프가 농민 생활을 시작하는 2부를
구상하고 있었으나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작가가 '세계의 양심'으로 이목을 끌고 있던
시기의 작품이었던 만큼 "부활"은 읽는 이에게 공감을 일으켜 사상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약전
  톨스토이는 1828년 8월28일 중부 러시아의 루라 시 근교 야스나야폴라나에서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두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세 명의 형과 누이동생이 있었다. 부친의 사망 이후 그들의 교육은 숙모인 오스텐 사켄
백작 부인이 맡았으나 숙모도 4년 후에 사망하였으므로 또 다른 숙모인 유시코프
부인에게로 옮겼다
  톨스토이의 용모는 몹시 추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비관하였다고 하며 그의 기이한
행동은 소년 시절부터 나타났다. 하늘을 날아보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린 일까지
있었다. 숙모의 집에서 프랑스 사람과 독일인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고 15세에
형들과 함께 카잔 대학에 입학하여 동방어학과를 선택하였으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법률학과로 옮겼는데 관료주의적인 학과 규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1847년에 중도
퇴학을 하고 말았다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던 톨스토이는 사교적인 숙모의 영향을 받아 쾌락에 잠겨
방종한 생활을 보내다 우연히 루소의 "참회록"과 "에밀"을 읽고 감동을 받았고 루소의
저서라면 "음악 사전"까지 읽었으며 루소의 초상을 휘장처럼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한다.
  20세에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학사 시험에 합격하여 법학사 칭호를 얻자 자기의
영지로 돌아가 지주로서 농노 해방의 이상을 품고 농사 개량에 착수하였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청년 시절에 쓴 대학 논문 "토지 사유론"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은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여 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농촌 생활에 염증이 난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나왔는데 그에게는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다. 도박과 주색에 빠져 타락한 러시아 귀족의 생활을 하여 몇 번이나 자살을
결심한 일도 있었다.
  이 때 아우를 염려한 형 니콜라이의 권유에 따라 카프카스 지방의 수비대에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함으로써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카프카스의 자연과 그 지방의 생활 양식은 그에게 처음으로 예술적 재능을 깨닫게
하여 예술 창작을 시도하였다. 24세에 "유년 시대" 등 기타 수 편의 작품을 내었다
  1853년 10월(25세)에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포병 사관으로 종군하여 이 전쟁의
양상을 선명하게 묘사한 수 편의 단편을 세바스로풀 지에 내어 일반 독서계에 필명을
알리기 시작했다
  1862년 9월(34세) 소년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소피아와 결혼을 하여 가정 생활을
시작했다. 소피아의 나이는 18세였다. 결혼 이후 그는 창작에 비상한 감흥을 가지고
몰두하였다
  1869년(41세) "전쟁과 평화" 완성. 48세에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
  1908년 8월 28일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차원의 80주년 생일 축하식을
거행했다
  1910년 10월 18일 집을 떠나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 날 새벽녘 친구인 의사
도산과 함께 수도원에 있는 누이동생을 만나기 위해 떠났던 것이다. 그의 일기와
마코비츠키의 말에 의하면 집을 나와서 처음으로 시원스런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기차에서 감기에 걸려 아스타포바 역에서 하차했는데 그 해 11월 7일 역장의
집에서 숨졌다
  그의 뜻에 따라 장례 절차는 극히 소박하였으나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농민 학생
공장 노동자들이 각 지역에서 작은 역에 몰려들어 '러시아의 대작가'의 유해를 어깨에
메고 그의 출생지 야스나야폴라나로 행진하였다. 관을 묻은 후 수십일 동안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영이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였다고 한다. 그 후 묘지는 모든 나라
사람들의 순례의 땅이 되었다.
  로맹 롤랑으로 하여금 '세계의 아버지'라 부르게 하였고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예술의 신'이라 경탄케 하였고 성자 간디로 하여금 '나의 생애를 이끌어 준 훌륭한
교사'라 숭배하게 하고 레닌마저 '만국 근로 대중의 친구'라고 말한 톨스토이는
독자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은 수십 개 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그에
대한 연구서만 해도 무려 2만 3천 권을 넘으며 또한 계속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