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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의 가족과 비무기의 모함>
오자서(伍子胥)는 초(楚)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원(員)이다. 오원(伍員)의 아버지는 오사(伍奢), 오원의 형은 오상(伍尙)이었다. 그의 선조로 오거(伍擧)가 있었는데 초 장왕을 바른 말로 섬겨 이름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 후세가 초나라에서 명망이 있었다.

초나라 평왕(平王)에게 건(建)이라는 태자가 있었는데, 오사를 태부(太傅)로, 비무기(費無忌)를 소부(少傅)로 삼았다. 비무기는 태자 건에게 충성스럽지 못했다. 평왕이 비무기에게 태자를 위해 진(秦)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해오도록 했다. 진나라의 여자가 아름다워 비무기는 달려와 평왕에게 “진나라의 여자가 절세미인이니 왕께서 취하시고 태자를 위해서는 다른 여자를 얻게 하십시오.”라고 보고했다. 평왕이 마침내 진나라의 여자를 취하여 아주 특별히 총애하더니 아들 진(軫)을 낳게 했다. 태자를 위해서는 다른 여자를 취하게 했다.

비무기는 진나라의 여자로 평왕의 비위를 맞추고 태자를 떠나 평왕을 섬겼으나 일단 평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 태자 건을 헐뜯었다. 건의 어머니는 채나라의 여자로 평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평왕이 갈수록 건을 멀리 하여 건에게 성보(城父)를 지키며 변방을 수비하게 했다.

얼마 뒤 비무기는 또 밤낮으로 태자의 허물을 왕에게 말했다.

“태자는 진나라의 여자 때문에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왕께서는 미리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태자는 성보에 거처하고부터 군을 거느리고 밖으로 제후들과 교류하면서 들어와 난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평왕이 바로 태자의 태부 오사를 불러 캐물었다. 오사는 비무기가 평왕에게 태자를 헐뜯었다는 것을 알고는 “왕께서는 어찌하여 소인배 놈의 헐뜯는 말만 듣고 골육의 정을 멀리하려 하십니까?”라고 했다. 비무기가 “왕께서 지금 제압하지 않으면 그 일이 성사되고 오히려 왕께서 붙잡히실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평왕은 크게 노하며 오사를 가두고 성보의 사마분양(司馬奮揚)에게 태자를 죽이라고 했다.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분양은 사람을 태자에게 보내 미리 “태자께서는 빨리 도망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알렸다. 태자 건은 송나라로 도망쳤다.

비무기가 평왕에게 “오사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모두 똑똑합니다. 죽이지 않으면 초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아비를 인질로 잡고 부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초나라의 우환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오사에게 사신을 보내 “너의 두 아들을 부르면 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라고 했다. 오사는 “오상은 사람이 어질어 부르면 틀림없이 올 것이다. 오원은 사람이 강하고 독하며 치욕도 참을 수 있어 큰일을 할 수 있다. 그 애는 왔다가는 함께 잡힐 것이 뻔히 보이니 분명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왕은 듣지 않고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을 부르게 하면서 “오면 내가 너희 아비를 살려 주겠지만 오지 않으면 바로 오사를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

오상은 가고자 했으나 오원은 “초나라에서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탈출하여 훗날 근심거리가 생기는 것이 두려워서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거짓말로 두 아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가면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죽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갔다가는 아무도 복수할 수 없을 뿐입니다. 다른 나라로 도망쳐서 그 힘을 빌려 아버지의 치욕을 갚는 것이 낫지 다 같이 죽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오상은 “간다고 해서 아버지의 목숨을 어쨌든 구할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를 부르시는데 가지 않고, 이후 치욕도 갚지 못한다면 결국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라면서 오원에게 “너는 가거라! 너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돌아가 죽겠다.”라고 했다. 오상을 붙잡고 나서 사자가 오자서를 체포하려 했다. 오자서는 활에 화살을 매겨 사자를 겨누었다. 사자가 감히 들어가지 못했고, 오자서는 마침내 달아났다. 태자 건이 송나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가서 그를 따랐다.

오자서가 도망갔다는 말을 들은 오사는 “초나라 군신들이 전쟁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오상이 초나라에 이르자 초나라는 오사와 오상을 함께 죽였다.

<오자서의 탈출과 오왕 합려의 패권>
오자서가 송나라에 이르렀을 때 송나라에는 화씨(華氏)의 난이 터져 바로 태자 건과 함께 정나라로 도망쳤다. 정나라 사람이 아주 잘 대해주었으나 태자 건은 다시 진(晉)나라로 갔다. 진나라 경공(頃公)은 “태자가 정나라와 사이가 좋고 정나라는 태자를 믿는다. 태자가 나를 위해 안에서 호응해 주고 내가 밖에서 치면 틀림없이 정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 정나라를 멸망시키면 태자로 봉하겠다.”라고 했다. 태자가 바로 정나라로 돌아갔다.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사로운 일로 시종을 죽이는 일이 터졌다. 시종이 이 일을 정나라에다 고해바쳤다. 정나라의 정공(定公)과 자산(子産)은 태자 건을 죽였다.

건에게는 승(勝)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오자서는 겁이 나서, 승과 함께 바로 오나라로 달아났다. 소관(昭關)에 이르자 소관에서 그들을 잡으려 했다. 오자서가 승과 단신으로 걸어서 도망치다 거의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추격이 바로 뒤에 따라 붙었다. 강에 이르자 강에 있던 어부가 배를 몰다가 위급한 오자서를 보고는 바로 오자서를 건너게 해주었다. 강을 건넌 오자서가 자신의 검을 풀면서 “이 검이 백금은 나가니 어부 당신에게 주겠소.”라고 했다. 어부는 “초나라 법에 오자서를 잡는 자는 5만 석의 양식에 작위까지 받는데, 그까짓 백금 나가는 검이 대수겠소!”라며 받지 않았다. 오자서는 오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병이 나서 길을 멈추고 먹을 것을 구걸했다. 오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왕 요(僚)가 막 집권했고 공자 광(光)은 장군이었다. 오자서는 공자 광을 통해 오왕을 만나고자 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초나라 평왕의 변방 읍인 종리(鐘離)와 오나라의 변방 읍인 비량지(卑梁氏)는 모두 누에를 쳤다. 두 곳의 여자들이 뽕나무를 두고 다투다 서로를 공격하여 크게 화가 나서는 두 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서로를 공격했다. 오나라는 공자 광에게 초나라를 정벌하게 하여 종리와 거소(居巢)를 함락시키고 돌아왔다. 오자서가 오왕 요에게 “초나라를 깰 수 있습니다. 다시 공자 광을 보내시기 바랍니다.”라고 유세했다.

공자 광은 오왕에게 “저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에서 피살당했습니다. 왕께 초나라를 치라고 권하는 것은 자신의 원수를 갚고 싶어서입니다. 초나라를 정벌해도 깰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오자서는 공자 광이 왕을 죽이고 자립하려는 은밀한 뜻이 있어 대외적인 일을 말할 때가 아님을 알고는 공자 광에게 전제(專諸)를 추천하고는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과 야외에서 농사를 지었다.

5년이 지나 초나라 평왕이 죽었다.(기원전 516년) 당초 평왕이 태자 건의 아내가 될 진나라의 여자를 빼앗아 아들 진(軫)을 낳았다. 평왕이 죽자 진이 결국 뒤를 이으니 이가 소왕(昭王)이다.

오왕 요는 초나라의 상을 이용하여 두 공자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초나라를 기습하게 했으나 초나라가 군대를 징발하여 오나라 군대의 퇴로를 끊어서 돌아오지 못했다. 오나라 내부가 비자 공자 광은 전제에게 오왕 요를 습격하여 찔러 죽이고 자립했다. 이가 오왕 합려(闔廬)이다. 합려가 즉위하여 뜻을 이루자 바로 오원(오자서)을 불러 행인(行人)으로 삼고 함께 나라 일을 도모했다.

초나라가 그 대신 극완(郤宛)과 백주리(伯州犁)를 죽였을 때 백주리의 손자인 백비(伯嚭)도 오나라로 도망쳐 왔는데, 오나라가 백비도 대부로 삼았다. 앞서 오왕 요가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라고 보낸 두 공자는 길이 끊어져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합려가 왕 요를 시해하고 자립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군대를 들고 초나라에 항복해버렸다. 초나라는 그들을 서(舒)에 봉했다.

합려는 즉위 3년(기원전 512년), 군대를 일으켜 오자서, 백비와 함께 초나라를 쳐서 서를 함락시키고 마침내 과거 오나라를 배반한 두 장군(공자)를 잡았다. 내친 김에 영(郢)까지 가려고 하자 장군 손무(孫武)가 “인민들이 지쳐 있어 안 됩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라고 하여 바로 돌아왔다.

4년에 오나라가 초나라를 쳐서 육(六)과 잠(灊)을 취했다.

5년에 월(越)나라를 쳐서 물리쳤다.

6년에 초나라 소왕이 공자 낭와(囊瓦)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오나라는 오원에게 맞아 싸우게 하여 초나라의 군대를 예장(豫章)에서 대파하고 초나라의 거소를 취했다.

합려 9년에 오왕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에게 “처음에 그대들은 영(郢)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소?”라고 했다. 두 사람은 “초나라의 장수 낭와는 욕심이 많고 당(唐)나라, 채(蔡)나라가 모두 그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기어코 초나라를 크게 정벌하시겠다면 반드시 당나라, 채나라를 먼저 얻어야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려가 그 말을 들어 군사를 모조리 일으켜 당나라, 채나라와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와 한수(漢水)를 끼고 진을 쳤다. 오왕의 동생 부개(夫槪)가 군대를 거느리고 따르길 청했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자 결국 자신에게 속한 5천 명으로 초나라의 장수 자상(子常)을 공격했다. 자상이 패하여 정(鄭)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오나라는 승기를 타고 전진하여 다섯 번 싸우면서 마침내 영(郢)에 이르렀다. 기묘일에 초나라 소왕이 달아났고, 경진일에 오왕이 영에 들어왔다.

소왕이 도망쳐 운몽(雲夢)으로 들어섰으나, 도적이 왕을 공격하는 바람에 왕은 운(鄖)으로 달아났다. 운공(鄖公)의 동생 회(懷)가 “평왕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인다고 안 될 것은 없겠지요?”라고 했다. 운공은 동생이 소왕을 죽일까 두려워하여 왕과 함께 수(隨)나라로 달아났다. 오나라의 군대가 수나라를 포위하고는 수나라 사람들에게 “주나라의 자손이 한수에 있었으나 초나라가 전부 멸망시켰다.”라고 하자 수나라 사람들이 왕을 죽이려 했고, 왕자 기(綦)가 소왕을 숨겨 놓고는 자기가 왕인 것처럼 했다. 수나라 사람들이 점을 쳐서 오나라에 왕을 넘겨주려 했으나 점괘가 불길하다고 나와 오나라에 거절하고 왕을 넘겨주지 않았다.

당초 오자서는 신포서(申包胥)와 친구였다. 오자서가 도망치면서 신포서에게 “내가 기어이 초나라를 엎을 것이다!”라고 하자 포서는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보존할 것이다!”라고 했다. 오나라의 병사들이 영에 들어왔을 때 오자서는 소왕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내 300번 채찍질을 가한 다음 그만두었다. 신포서가 산속으로 도망가서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그대의 복수가 이렇게 심하다니! 내가 듣기에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기지만 끝내는 하늘이 사람을 물리친다고 했소. 그대는 과거 평왕의 신하로서 북면하고 그를 섬겼거늘 지금 죽은 사람을 욕보이니 이 어찌 하늘의 도를 어기는 극한 행동이 아니리오!”라고 했다.

오자서는 “나를 위해 신포서에게 사과하고 내가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이 멀어 이치에 어긋나지만 일을 거꾸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일러 주시오.”라 했다. 이에 신포서는 진(秦)나라로 가서 위급함을 알리고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신포서는 진나라의 궁궐 뜰에서 밤낮으로 통곡을 하는데 7일 밤낮 동안 그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진나라의 애공(哀公)이 이를 가엾게 여겨 “초나라가 무도하긴 하지만 이런 신하가 있으니 어찌 존속하지 않으리오?”라며 바로 전차 500승을 보내 초나라를 구원하여 오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6월에 직(稷)에서 오나라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한편 오왕(합려)이 초나라에 오래 머물면서 소왕을 찾고 있을 때 합려의 동생 부개가 도망쳐 돌아와서는 왕으로 자립했다. 이를 들은 합려는 바로 초나라를 풀어주고 돌아와 그 동생 부개를 쳤다. 부개는 패하여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 소왕은 오나라에 내란이 벌어진 것을 보고는 바로 영으로 다시 들어왔다. 부개를 당계(堂溪)에 봉하고 당계씨(堂溪氏)라 했다. 초나라가 다시 오나라와 싸워 오나라를 물리치니 오왕은 바로 돌아갔다.

2년이 지나(기원전 504년)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정벌하게 하여 파(番)를 취했다. 초나라는 오나라가 다시 대거 쳐들어 올 것을 걱정하여 영을 버리고 약(鄀)으로 옮겼다. 이 무렵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무의 모략으로 서쪽으로는 강한 초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晉)나라에 위세를 떨치고, 남으로는 월나라 사람을 굴복시켰다.

그 후 4년(기원전 기원전 500년)에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상이 되었다.

<합려의 죽음과 부차와의 갈등>
5년 뒤에 (오나라가) 월나라을 정벌했다. 월왕 구천(句踐)이 반격을 가해 고소(姑蘇)에서 오나라를 패배시키고 합려의 손가락에 부상을 입히니 군대가 물러갔다. 합려가 부상 때문에 죽게 되자, 태자 부차에게 “너는 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을 잊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부차는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 날 저녁 합려가 죽었다. 부차가 왕에 올라 백비를 태재(太宰)로 삼고 군대를 훈련시켰다.

2년 뒤에 부추(夫湫)에서 월나라를 패배시켰다. 이에 월왕 구천은 남은 5천 병력을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 위로 들어갔다. 대부 문종(文種)에게 후한 예물을 주어 오나라의 태재 백비에게 보내 강화를 청하며 나라를 맡기고 신하와 첩이 되겠다고 구걸했다. 오왕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오자서는 “월왕이란 사람은 고생을 잘 견딥니다. 지금 왕께서 없애지 않으면 훗날 틀림없이 후회하실 겁니다.”라고 했다. 오왕이 듣지 않고 태재 백비의 계책대로 월나라와 강화했다.

그 뒤 5년(기원전 489년)에 오왕이 제나라에서 경공(景公)이 죽자 대신들이 권력을 다투고 새 군주가 약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군대를 일으켜 북으로 제나라를 토벌하려 했다. 오자서가 “구천이 식탁에 한 가지 반찬만 올리고, 죽은 사람과 아픈 사람을 조문하는 것은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이 인간이 죽지 않으면 틀림없이 오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오나라에게 월나라란 존재는 사람 뱃속에 들어있는 질병과 같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먼저 월나라를 처리하지 않고 제나라에만 힘을 쓰고 계시니 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오왕은 듣지 않고 제나라를 토벌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를 대패시키고 마침내 추(鄒)나라와 노나라의 국군을 위협하고 돌아왔다. 오자서의 계책을 더욱 멀리했다.

그 뒤 4년에 오왕이 북쪽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월왕 구천은 자공(子貢)의 모략을 활용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오나라를 돕는 한편 많은 보물을 딸려 보내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태재 백비는 여러 차례 월나라의 뇌물을 받고는 월나라를 더욱 더 믿고 아껴서 밤낮으로 오왕에게 이야기했다. 오왕은 백비의 계책을 믿었다.

오자서가 “대저 월나라는 뱃속의 병과 같습니다. 지금 그 허황된 말과 거짓을 믿고는 제나라를 탐내고 계십니다. 제나라를 깨부수는 일은 비유컨대 자갈밭과 같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반경지고(盤庚之誥)」에서는 ‘제 멋대로 명에 따르지 않으면 베고 죽여서 그 후대가 남지 못하게 해야 하고 다시 거기서 자라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상이 중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왕께서는 제나라를 내려놓고 월나라를 먼저 처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후 후회막급일 것입니다.”라고 간했다.

그러나 오왕은 듣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는 떠나기에 앞서 그 아들에게 “내가 왕에게 여러 차례 간했으나 왕이 써주질 않는다. 내가 지금 보니 오나라가 망할 것 같다. 네가 오나라와 함께 망하는 것은 무익하다.”라 하고는 그 아들을 제나라의 포목(鮑牧)에게 맡기고 돌아와 오왕에게 보고했다.

오나라의 태재 백비는 오자서와 틈이 벌어지자 “오자서는 사람이 사납고 각박하고 잔인합니다. 그의 원망이 큰 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겁이 납니다. 지난 번 왕께서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오자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왕께서 끝내 제나라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오자서는 자신의 계책이 수용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오히려 원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왕께서 또다시 제나라를 치려하시는데 오자서가 자기 멋대로 일을 방해하고 헐뜯는 것은 그저 오나라가 패하여 자신의 계책이 옳았음을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왕께서 친히 행동에 나서 나라 안의 모든 무력을 동원하여 제나라를 토벌하려는데 오자서는 간언이 수용되지 않자 구실을 찾아 일을 내던지고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으려 합니다. 왕께서는 대비하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 뻔합니다. 그리고 이 백비가 사람을 시켜 오자서를 은밀히 살피게 했더니 그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그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에게 맡겼습니다. 무릇 신하된 자가 안에서 뜻을 얻지 못한다고 밖으로 제후와 결탁하고, 자신이 선왕의 신하라는 것만 믿고 지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늘 원망과 불만입니다. 원하옵건대 왕께서는 일찌감치 처리하십시오.”라고 했다.

오왕은 “그대가 한 말 나 역시 의심하고 있었다.”라 하고는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촉루(屬鏤)라는 검을 내리며 “그대는 이것으로 죽으라!”라 했다.

<오자서의 죽음과 오나라의 멸망>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 “오호! 간신 백비가 난리를 치는데 왕은 반대로 나를 죽이는구나. 내가 네 애비를 패주로 만들고, 네가 아직 즉위하지 않고 여러 공자들이 자리를 다툴 때 내가 선왕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너를 지켜 간신히 즉위하게 만들었다. 네가 즉위한 다음 오나라를 나누어 내게 주겠다고 했을 때도 나는 감히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네가 아첨하는 신하의 말만 믿고 이 늙은이를 죽이려 하다니!”라며 탄식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수하에게 “반드시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그것으로 관을 짜도록 하고, 내 눈알을 파내 오나라의 동문 위에 걸어 월나라 놈들이 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하고는 검에 엎어져 죽었다.

오왕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화를 내며 오자서의 시신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서는 강물에 내던지게 했다. 오나라 사람들이 오자서를 가엾게 생각하여 강 위에다 사당을 세우고는 서산(胥山)이라 불렀다.

오왕은 오자서를 죽이고 마침내 제나라를 토벌했다. 제나라의 포씨가 그 국군 도공(悼公)을 죽이고 양생(陽生)을 옹립했다. 오왕이 역적을 토벌하려고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 2년에 오왕이 노나라, 위(衛)나라의 국군을 불러 탁고(橐皐)에서 회맹했다.

그 이듬해에 북으로 올라가 황지(黃池)에서 제후들과 큰 회맹을 갖고 주 왕실을 끼고 호령하려 했다. 월왕 구천이 (이 틈을 타서) 기습을 가해 오나라의 태자를 죽이고 오나라의 군대를 격파했다. 오왕이 이를 듣고는 바로 귀국하여 넉넉한 예물로 월나라와 강화했다.

그 후 9년(기원전 473년)에 월왕 구천이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왕 부차를 죽였다. 그리고 태재 백비도 죽였는데 군주에 불충하고 적에게 엄청난 뇌물을 받고 월왕 자신과 내통했기 때문이다.

당초 오자서와 함께 초나라로 도망쳤던 죽은 태자 건의 아들 승이 오나라에 있었다. 오왕 부차 때 초나라 혜왕이 승을 불러 초나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자 엽공이 “남에게 이기길 좋아하여 만용을 부리고 몰래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있으니 아마 사사로운 꿍꿍이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간했으나 혜왕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끝내 승을 불러 초나라의 변방 읍인 언(鄢)에 살게 하면서 백공(白公)이라 불렀다. 백공이 초나라에 돌아온 지 3년이 되던 해에 오나라는 오자서를 죽였다.

백공 승이 초나라에 돌아와서는 정나라가 그 아버지를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몰래 결사대를 길러 정나라에 보복하려 했다. 초나라에 돌아온 지 5년째 정나라를 정벌하자고 청하니 초나라의 영윤 자서(子西)가 이를 허락했다. 병사를 출발시키지도 않았는데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여 정나라가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초나라는 자서를 보내 구원하고, 맹서한 뒤 돌아왔다. 백공 승은 “정나라가 원수가 아니라 자서가 원수다!”라며 화를 냈다. 승이 스스로 검을 갈자 누군가 “왜 그러십니까?”라고 물었다. 승은 “자서를 죽이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자서가 이를 듣고는 웃으며 “달걀 같은 애송이 승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했다.

그 뒤 4년에 백공 승은 석걸(石乞)과 함께 초나라의 영윤 자서와 사마자기(司馬子綦)를 조정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석걸이 “왕을 안 죽이면 안 됩니다.”라 하고는 왕을 겁박하여 고부(高府)로 갔다. 석걸의 시종 굴고(屈固)가 초나라 혜왕을 업고 소부인(昭夫人)의 궁으로 달아났다. 엽공은 백공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나라 사람들을 거느리고 백공을 공격했다. 백공의 무리가 패하여 산속으로 도망갔고, 백공은 자살했다. 석걸을 사로잡아 백공의 시신이 있는 곳을 물으며 말하지 않으면 삶아 죽이겠다고 했다. 석걸이 “일이 성사되면 경이 되고, 일이 성사되지 않아 삶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라며 끝내 시신이 있는 곳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석걸을 삶아 죽이고, 혜왕을 찾아 다시 옹립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해치는 말이 참으로 심하게 영향을 끼치는구나! 왕도 신하에게 차마 그렇게 못하거늘 하물며 동료에게야! 오자서가 오사를 따라 함께 죽었더라면 땅강아지나 개미와 무엇이 달랐겠는가? 작은 의리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그 이름을 후세에 남겼으나 참으로 비장하구나! 오자서는 강에서 곤궁에 빠지고 길에서 구걸을 하면서 단 한시도 초나라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치욕을 견디고 공명을 세웠으니 장렬한 대장부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백공이 국군으로 자립하지 않았다면 그 공과 모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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