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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

2013.02.23 20:18

이규 조회 수:1982

베르그손(Bergson)의 삶의 철학에서 본 시간과 공간

                                                          황 수 영(서울대 강사, 철학)

   

1. 들어가는 말

  앙리 베르그손(1859-1941)은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시간과 공간에 관해 매우 독특하고 심도있는 철학을 전개한 사상가로 일컬어진다. 삶의 철학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철학의 특징은 존재의 궁극적 원리를 그 역동적(dynamic) 생명력에서 찾는 데 있다. 질적이고 역동적 본성을 가진 생명적 운동은 존재 속의 이질적 특성들을 스스로 통합하는 유기적인 힘이며 생성(生成, le devenir)의 원리이기도 하다. 시간은 생성하는 존재 자체의 모습이며 과학이 가정하는 균일한 양적 흐름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시간에 대한 베르그손의 관념은 전통적 형이상학을 전도시키고 삶의 의미를 되찾아준 것으로 평가된다.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플라톤은 존재의 참모습을 고정적이고 부동적인 본질의 세계에서 찾았으며 그 때문에 운동과 변화를 지시하는 시간은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한 현상 세계에 속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관점은 근대 과학을 거쳐 현대까지도 그 권위를 잃지 않고 있다. 가령 과학주의자들은 오늘날 이론의 잠정적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의 보편성과 고정성을 추구하면서 경험 세계의 참모습을 보려 하지 않고 있다. 베르그손은 과학주의와 정적인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입장들이 인간 지성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지성은 실재하는 생명적 흐름을 고정시키는 인식 기능이므로 생명의 본래적 의미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실재의 구체적인 모습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직관적 인식의 발견 외에도 수학을 비롯하여 생명과학, 심리학, 물리학 등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베르그손의 형이상학적 입장으로 돌리는 것은 그의 철학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 그의 생명적 도약의 철학은 근대 이후의 기계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정신의 질적 본성을 잘 드러내 주었으며 인간의 생명적 근원을 상기하고 자유와 창조를 역설한 점에서 생명공학의 비약적 발달과 더불어 과학의 의미와 인간의 위상이 문제시되는 오늘날 여전히 의미있는 철학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2. 시간의 다양한 이미지들

  시간의 개념은 전통적으로 삶의 유한성과 관련하여 비극적인 뉘앙스를 표현해 왔다. 시간 속에서 살게끔 단죄된 생명체인 인간은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은 결핍과 불완전의 상징이고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규정하는 죽음의 사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반면 공간은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으로서 기능해 왔다. 인간의 역사는 시간에 대한 무력함을 공간에 대한 지배로 보상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진행되어 왔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어쨌든 민족과 국가간의 전쟁에서뿐만 아니라 개인과 가족의 욕망을 위해서도 그들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는 공간을 넓히는 것은 권력의 표상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작용도 없이 생명 혹은 물질적 활동의 균일하고도 투명한 바탕에 불과한 것이라 보는 것은 매우 소박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의 의미는 삶을 향한 생명과 인간의 부단한 노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베르그손은 19세기에 발달한 진화론 사상을 그의 고유한 삶의 철학 안에 수용함으로써 생명과 시간의 의미를 다시 숙고할 기회를 가졌다. 시간과 공간은 여기서 전통적인 견해를 역전시키면서 삶과 관련한 생생한 의미를 되찾고 있다. 시간은 더 이상 유한성과 죽음에로 단죄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이 스스로를 보존하고 성숙시키고 창조하는 삶의 무대이다. 물론 개체적 삶을 사는 각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생식(生殖)이라는 놀라운 현상, 모든 생명체에서 마치 그것이 생명의 궁극적 목적이라도 되는 양 어김없이 일어나고 있는 생식 현상은 생명의 시간적 영속을 보장하는 비밀의 열쇠가 아닌가? 오늘날 진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전자 고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각 종들의 근원적 동질성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연계를 맺으면서 변화하고 영속해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생명은 끊임없이 시간을 극복하거나 적어도 그것과 타협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다면 시간과 생명에 관한 전통적인 부정적 이미지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인간은 누구나 불사를 꿈꾸며 젊음을 향한 향수에 젖어 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야말로 시간을 지배하는 힘처럼 보인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듯이 시간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간과 달리 시간은 비가역성(irréversibilité)을 특성으로 한다. 공간은 무한한 시행착오의 장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오류를 시정하고 자신의 힘을 넓혀 나간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인간의 힘은 미약하기만 하다. 공간 속에서 우리는 잘 못 들어선 길을 되돌아갈 수 있으나 시간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잘못된 것을 인식하고 시정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그렇게 시정된 후의 삶은 더 이상 과거의 그것이 아니다. 흘러간 시간은 누구도 주워담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두려워 하고 자신의 나이, 자신의 시대를 부정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이 시간을 두려워 하는 것은 삶의 본질에 마주서기를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삶은 시간적 본성을 갖는다. 시간과 더불어 삶은 성숙하고 역사를 만든다. 이 역사와 더불어 의미의 세계가 생겨난다. 시간을 부정하고 어떻게 삶을 긍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삶을 부정하고 어떻게 행복과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시간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갖게 되는 것은 시간을 공간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대로 조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긍정은 이와 같은 인위적 시간 개념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시간의 본래적 의미를 파악할 때 가능하다. 베르그손은 철학사에 나타난 어떤 입장보다도 삶과 시간의 구체적 연관성에 대해 깊이 숙고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를 추적함으로써 삶의 시간의존성 그리고 시간의 생명의존성을 역설하는 하나의 경이로운 시각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3. 시간의 본래적 의미 -- 질적 변화와 지속

  “시간이 존재하고, 그것은 공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Le temps existe, et ce n'est pas de l'espace.” 베르그손은 자신의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어느 청중에게 이와 같은 짤막한 말로 대답하였다. 이 단순해 보이는 공식은 사실 매우 많은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선 시간이 존재한다는 첫 번째 문장은 상당수의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존재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것임이 분명하다. 초기 희랍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시간을 일컫는 크로노스(kronos)라는 말은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진 시간, 사건으로서의 시간 즉 생성(le devenir)을 의미한다. 시간은 파르메니데스의 부동, 불변의 일자(一者, l'Un)에 대립하는 역동적 본성을 가진 흐름이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 운동, 변화와 동일시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는 시간은 운동하는 존재 자체의 모습일 뿐 그것과 무관하게 흐르는 동일자가 아니다. 구체성에서 출발하는 베르그손의 철학은 이와 같은 생성으로서의 시간을 실재(le réel)의 본모습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식 속에서 시간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보통 시간이 우리의 삶와 관계없이 먼 옛날부터 흘러왔고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나아가면 우리는 이러한 시간이 우리의 의식이나 어떤 사건 또는 생명체의 삶과 무관하게 균일하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사실 유용성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이를 극단적으로 추상화한 근대 과학의 시간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상식은 대부분의 경우 그 시대의 과학적 사고에 의해 침투되어 있기 때문에 둘 사이의 경계를 엄밀히 가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과학과 상식이 시간을 측정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의 삶을 온통 시간적 단위들로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장 내일 하루의 계획을 짤 때 시간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시간은 우리의 의도에 따라 일단 양적으로 나누어지고 그 나누어진 시간의 조각들은 다시 합쳐지거나 서로 교환되기도 하고 더하거나 빼는 일련의 조작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서 시간은 뒤로 가기도 하고 앞으로 가기도 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곧 그것은 가역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내일의 계획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회상할 때도 우리는 이미 지나간 시간을 이리저리 바꾸어 보며 기뻐하기도 하고 회한에 젖기도 한다. 이렇게 이해된 시간의 본성은 임의의 단위로 분할된 불연속적인 순간들의 합이다. 그 단위들을 조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고 여기서 시간 그 자체는 아무런 작용도 하고 있지 않다. 마치 무색, 무취, 무정형의 공기처럼 시간은 조작되기만을 기다리는 질료와 같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상식은 시간을 어떤 형식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우리는 초기 희랍인들처럼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 자체를 시간과 동일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시간은 항상 그 배후에 존재함으로써 그 사건을 담지하는 용기(用器)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시간은 모든 사건에 앞서서 즉 선험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어떠한 경험도 시간에 앞 설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특정한 지속 기간을 갖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이것을 칸트는 시간이 공간과 더불어 감성의 선험적 형식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관문으로서 우리의 주관 속에 각인된, 세계를 보는 안경과 같은 것이다.
  상식이건, 과학이건, 철학이건 간에 이 모든 견해들은, 시간이 우리 삶에 어떤 적극적인 작용도 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운행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시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질료적인 것으로 보든, 형식적인 것으로 보든, 또는 경험적인 것으로 보든, 관념적인 것으로 보든 그것은 공간과 더불어 실재의 배경에 불과하며 결코 실재의 운동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시간은 존재의 어떤 속성도 갖지 않는 투명한 바탕에 불과하다. 시간이 존재한다는 베르그손의 말은 따라서 이러한 일반적 견해를 뒤집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에 대한 전폭적 긍정을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을 어떤 적극적인 것으로서 그 실재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을 변화의 무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모험적이지만 변화 자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세계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변화가 없는 영원의 세계는 시간이 정지된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이념 속에 존재할 뿐이다. 철학의 위대한 아버지 플라톤의 생각과 달리 존재는 근본적으로 시간적 특성을 가지며 따라서 시간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실제의 상식 속에서도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부정적으로나마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만난 지인(知人)의 얼굴에서 우리가 시간의 주름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없어질 수도 있는 우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프루스트는 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은 모든 존재에게 자신의 모습을 각인한다. 계절의 순환처럼 매년 되풀이되는 자연의 축제 속에서도 무엇인가는 끊임없이 낡아지고 죽어가고 있다. 물론 시간은 이처럼 파괴적인 것만은 아니다. 시간은 또한 성숙과 창조의 동인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맹목적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 위와 같은 말들을 되뇌었던가? 그리고 시간은 실제로 얼마나 달콤한 마취제로 작용했으며 때로는 현명한 교사의 역할을 했던가? 시간이 흐른 후에 치유가 된 고통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비로소 알 수 있던 것들을 우리는 시간을 생략하고서 얻을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시간은 산고를 견뎌내게 해주는 산파이자 우리의 삶을 창조로 이끄는 안내자이다.
  이와 같이 의미로 가득찬 시간, 변화 자체로서의 시간이 실재적 시간의 모습이다. 상식은 때로 시간을 양적으로 분할 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건이나 경험의 텅 빈 배경으로서 제시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체험 자체로서의 시간을 배제하지 않는다. 상식은 최근의 과학에서부터 오래된 신화와 직접적 체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시간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은 상식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상가이다. 상식은 모든 철학의 출발점이다. 비록 철학 이론들이 어떤 차원에서는 상식과 대립하는 결론을 종종 내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상식의 무용성을 주장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상식은 우리 정신 활동의 모태이며 출발점이다. 그러나 모든 상식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상식의 역할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그것은 유용성을 향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상식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편리하게끔 역사적 지식이 조야한 형태로 한 시대 안에 축적된 것이다. 신화와 과학은 여기서 다양하게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상식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삶과 밀착될 수 있게해 주는 직관적 지식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 자연을 비롯하여 인간을 둘러 싸고 있는 모든 환경에 대해 인간은 전통적으로 알려진 유용한 지식 외에도 직접적인 경험에 의한 앎을 소유할 수 있다. 상식이 때로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말하는 경우는 이러한 직접적인 앎을 우리가 공동으로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베르그손이 강조하는 구체적 체험이나 직관적 지식은 이로부터 거리가 먼 신비적 형태의 지식이 아니다. 베르그손은 “직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지속 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Penser intuitivement est penser en durée)”라고 말한다1). 지속은 시간의 실재적 모습이자 우리의 삶의 모습이고 나아가 존재 자체의 모습이다. 직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삶을 객관화하고 조작하기 이전에, 삶과 진정으로 일치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이처럼 실재적 시간은 우리가 어떤 구체적 성격을 가진 변화 속에서 느끼는 시간이다. 변화가 없다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변화는 엄밀히 말해 질적인 변화를 말한다. 각 생명체는 서로 질적으로 다른 시간을 느낀다. 예를 들면 하루살이가 살다가 가는 잠깐의 시간, 오랜 시간을 번데기로 있다가 단 하루 동안 피어나는 삶을 살다 죽는 나비 등의 시간의식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 전적으로 다를 것이다. 이러한 생명체들은 시간을 동질적인(homogène)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질적인 변화 그 자체와 동일시할 것이다. 우리 자신도 사춘기나 갱년기 등 질적 변화를 하는 기간을 알고 있다. 이런 시기의 느낌은 시계추의 진동에 의해 나누어지는 동질적 시간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질적 변화의 느낌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의식 상태 속에서이다. 『의식의 직접 소여들에 관한 시론』이라는 베르그손의 첫 저서는 우리의 시간의식이 어떻게 해서 나타나는가를 의식 상태들에 관한 직접적 관찰에 의거하여 다룬 걸작으로 평가된다. 거기서 베르그손은 사회적 요구에 물들지 않은 내적 의식 상태들의 본래적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철학에서 지속하는 실재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범형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의식 상태들은 감각, 감정, 의지, 관념, 오성 등의 작용에 따라 그 질적인 내용에 차이가 있으며 생리적 영향에서부터 순수한 추상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기쁨이나 고통을 느끼게 된다. 질적 차이는 가령 지루한 강의가 길게 느껴지는 반면 흥미진진한 영화는 짧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데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시간의식은 이와 같은 표면적 심리 상태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의식 상태들은 외적인 자극에 몰두할 경우 그 본래적인 질적 성격을 상실하고 소통의 필요성에 의해 공통의 관심사에 이끌리게 된다. 공통적인 것은 내적 관점에서 볼 때는 인위적이며 따라서 정신의 고유한 특성을 배제한다. 내적 시간의식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의식의 가장 심층적인 단계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각각의 의식 상태들은 질적인 고유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가분적으로 상호침투(l'interpénétration)하고 있다. 의식 상태들의 이러한 특징을 기술하기 위해 베르그손은 두 가지 비유를 제시한다. 첫 째로 그것은 부분들이 서로간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유기체와 같다. 생명체를 이루는 각각의 부분들은 구분이 된다 하더라도 전체 속에서 서로 연대하고 있으며 이 연대성은 유기화(organisation) 작업의 기초가 된다. 유기적 전체는 각 부분들이 서로 이질적이면서도 하나로 긴밀하게 통합된 자기동일성(l'identité)을 유지한다. 두 번째로 의식 상태들의 연속(succession)은 공간 속의 점들처럼 병렬된 형태가 아니라 멜로디의 음들이 이루는 악절처럼 연결되어 있다. 멜로디의 각 음들은 매순간 현재가 과거를 반영하고 미래를 예고하는 형태로 서로가 서로에 의해 이해되는 유기적 연속을 보여 준다. 거기서 어느 한 음을 늘이거나 줄이거나 삭제할 경우 전체의 본성이 변화하기 때문에 그 요소들은 완벽한 의미의 연속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예에서 볼 때 의식 상태들의 연속이 나타내는 가장 큰 특징은 비가역적이라는 데 있다. 완벽한 의미의 연속은 뒤로 돌아갈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각 요소들이 마치 원자와 같은 고정된 형태로 분리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각 요소들의 관계만 바꾸면 된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와 같은 의식 상태들은 사실 부분이나 요소라는 말을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서로간에 유기적 결합을 이루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통일성이 부분들에 우선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의식 상태들의 연속의 비가역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존재 방식에서 유래한다. 또한 의식 상태들과 유기체 그리고 멜로디가 나타내는 존재 방식의 근본에는 기억이 있다. 시간을 시간답게 하는 것은 기억인 것이다. 실제로 유기체의 존재 방식은 그것의 삶의 방식과 떨어져서 생각될 수 없으며 그것의 삶은 또한 기억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기억은 유기체를 이루는 부분들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탄생과 성장, 노화의 현상은 불가사의한 것이 될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도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가 한 멜로디의 내부에서 매 번 이전의 단계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전체로서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을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의식 상태야말로 이러한 본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나의 감각, 감정, 의지, 표상 등의 상태들이 매순간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면 나의 자기동일성은 생겨날 수 없다. 거기에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순간적 의식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상태에 남아 현재와 유기적 통일을 이룸으로써 질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변화는 과거의 보존인 동시에 성숙과 창조일 수 있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의 개념은 단지 생명적 진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의미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거의 연속적 보존과 더불어 현재 속에서 질적 변화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매순간 창조적 진화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 시간의 공간화

  “시간이 존재하고, 그것은 공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손은 시간이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이 공간과 구별된다고 덧붙인다. 사실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그의 철학은 시간의 공간화를 경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시간의 공간화라는 말이 일견 생소한 것처럼 들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공간화된 시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리라. 앞서 본 바와 같이 시간의 본성은 질적 변화에 있다. 삶의 본질은 이러한 질적 변화를 내적 체험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실재적 시간을 느끼고 직관적 사유를 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직관보다는 지성(l'intelligence)에 의해 삶을 영위한다. 지성은 그 고유한 특성에서 볼 때 실재의 구체적 질을 느끼기 보다는 그것에 대한 양적 인식에 머문다. 이러한 관점에서 실재는 분할가능성으로 인지되며, 그런 한에서 본래의 생동하는 특성은 사상된다. 지성이 취급하는 시간은 과학적, 객관적 시간이며 그것은 시, 분, 초로 분할된 불연속적인 순간들의 합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시간을 일직선으로 무한히 뻗은 동질적(homogène) 흐름으로 생각할 때 이 동질성은 동일한 간격의 무한한 분할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은 측정가능성 즉 유용성을 목표로 하며 실재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다. 물론 객관적 시간의 동질성은 완전히 인위적인 것은 아니고 자연적 변화의 규칙성을 모방하고 있다. 가령 태양이나 달의 운동에서 우리가 공통적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규칙성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자연은 조금씩의 오차를 남기며 운동하고 있다. 거기에도 역시 일종의 질적 특성이 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오차를 무시하며 지성이 가정하는 완벽한 규칙성을 거기에 투사하여 동질적 시간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과학적 시간은 불완전한 자연적 규칙성 위에 우리의 편의를 위한 협약적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완성된 것이다. 일단 이렇게 만들어진 시간은 다시금 양적이고 분석적인 지성에 부과되어 세계를 보는 형식 또는 틀로 작용하게 된다.
  객관적 시간은 지성의 공간 표상에 의해 실재적 시간을 왜곡시킨 형태이다. 공간 표상은 지성으로 하여금 사물을 구분해서 파악하게 하고 그것들을 셀 수 있게 하며 그 극단적인 경우에는 무한 분할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인식의 틀이다. 사물을 불연속적 단위들로 취급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준다. 과학은 그 외면적인 순수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토대로 하는 양적 인식의 배후에는 실재를 왜곡시키면서까지 단순함과 유용성을 추구하는 본능적 욕구가 놓여 있는 것이다. 분석적 지성은 외적 대상들 뿐만 아니라 의식 상태들을 인식할 때도 그것들을 분해하여 마치 시계바늘과 시계추의 운동으로 상징되는 객관적 시간에 상응하는 것처럼 취급한다. 이렇게 하여 객관적 시간의 관념은 점차로 의식 내적 상태들에까지 침투하여 그것들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칸트가 잘 보여 주었듯이 시간과 공간은 감성의 형식이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은 실재적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표상에 의해 동질적으로 변형된 시간이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우리 지각은 엄밀히 말해 공간적 기초위에서 형성된다. 게다가 베르그손은 칸트의 형식으로서의 공간 개념을 뛰어 넘어 그것의 발생을 추적한다. 주관의 형식으로서의 공간은 이질적이고 비연장적인 감각들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균일한 상태로 병치시키고 단번에 파악한다. 이러한 “정신의 작용” 혹은 “지성의 노력”은 이질성에 대한 반발이며, 결국 모든 질을 양화시키는 공간화 작용이다2). 공간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인식론에서 발생학으로의 전환이며 이 전환은 공간 표상의 본성에 대해 더욱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해 준다.
  동질적 공간이란 질이 동일한, 더 정확히 말하면 질이 없는 완벽하게 비어 있는(vide) 공간이다. 베르그손이 ‘동질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하나의 동일한 질을 가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오해다. 그는 동질적이라는 말은 “모든 질의 부재(l'absence de toute qualité)”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상 질은 언제나 섞여서 나타나는 것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동질적이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이해하면 질이 없는 빈 상태와 동일한 것으로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러한 성격은 지성적 공간이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이념적(idéal) 지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유클리드 공간이다. 그런데 베르그손에 있어서 공간은 단순히 기하학적 작업을 가능케 하는 장일 뿐 아니라 추상적 사유와 분석적 활동 자체를 가능케 하는 지성의 근본 형식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수학적 공간의 형태로 제한될 수는 없고 오히려 지성에 극단적인 형식성을 부여하는 관념적 존재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피타고라스의 수,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제논의 역설 그리고 근대 수학은 바로 이러한 공간 표상 위에서 성립한다.
  동질적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 표상은 자연을 정복하는 도구로서의 인간 지성의 산물이지 실재에 대한 순수 인식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pratique) 삶과 행동의 필요성에서 유래한다. 행동의 요구는 실재적 지속과는 상반되는 것으로서 지성이 자아의 본래적 모습을 소외시키고 외화시키는 과정에서 실현된다. 베르그손은 『의식의 직접 소여들에 관한 시론』(이하 『시론』으로 약함)에서 자아가 표층과 심층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에 주목한다3). 우리의 내적 의식 상태 즉 심층자아가 상호 침투하는 흐름이며 자유의 본래적 모습인데 반해 사회적 삶과 관계하는 표층자아는 소통의 필요성에 의해 내적 상태를 양화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언어는 유동적 실재를 고착화시키는 공간 표상의 산물이다. 질적 변화는 고정되는 순간 그 본질이 왜곡될 수밖에 없으므로 언어는 실재를 충만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이처럼 표층자아로 갈수록 실제적 삶의 필요성은 절박해지고 이에 따라 공간 표상은 거의 절대적인 힘을 행사한다. 공간 표상은 내적 지속을 외면하고 삶을 균일한 단위들로 조작하는 지성적 작용의 극한적 도식이다. 내적 삶이 꿈꾸는 삶이라면 외적 삶은 행동하는 삶이다. 지성적 인식은 행동에서 유래하며 따라서 실재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 공간 표상의 기원에 관한 내용들은 『시론』에서 개요만 그려져 있다. 그것은 지성의 발생학과 더불어 『창조적 진화』에서 다루어진다. 공간이 행동적 지성에서 유래하면서도 지성의 인식틀로서 작용한다는 일견 순환적인 내용은 진화론적 고찰에 의해 정당화된다.

 

5. 진화의 역사와 자연적 공간

  시간이 우리의 무력함을 표현한다면 공간은 우리의 힘을 나타낸다고 라뇨는 말하고 있다4). 실제로 우리는 공간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힘을 의식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진화의 역사가 흘렀다. 우리가 생명 진화의 커다란 두 흐름에 주목할 때 삶의 양식도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식물은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스스로 축적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일정한 공간에 고착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요구하는 물질적 조건은 언제나 어디서나 균일하게 퍼져 있다. 때문에 식물은 자신이 우연히 삶의 터전을 두고 있는 장소에서 세계의 중심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위치에서 물질적 조건과 직접 접촉하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한다. 이러한 생존조건으로 인해 식물은 감각과 의식을 발달시킬 필요가 없으며 그것의 진화는 더 이상의 도약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동물은 스스로 에너지를 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식물이나 다른 동물들을 먹이로 하여 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운동적인 삶의 방식을 갖게 되었다. 운동은 동물로 하여금 의식을 깨어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다. 동물은 생존을 위해 다른 대상들을 찾아 헤매야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의 특성을 면밀히 지각하고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방식은 무한한 공간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동물들은 하등한 종에서 고등한 종까지 각기 자신에 고유한 지각장(知覺場)을 가지고 있다. 이 지각장이란 동물이 대상을 지각하고 자극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지시한다. 곧 그것은 동물을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게 함으로써 삶을 지탱해 주는 자연적 공간이다.
  자연적 공간은 동물이 표상하는 공간이 아니라 체험하는 공간이다. 동물들은 공간에 관한 본능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우회하지 않고 직선코스로 자신의 집을 찾아가는 귀소본능은 동물에게 있어 공간이 사고와 추론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과 본능으로 내재화된 인식임을 말해 준다. 이와 유사하게 동물에게는 삶의 터전인 집을 짓는 것도 본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 거미가 거미집을 만들거나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또 지성적 능력이 없이도 한결같이 이루어지는, 유전자에 각인된 행위이다. 이처럼 동물에 있어서는 동물의 신체와 그의 삶의 공간 사이에 유기적 연속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가? 신과 동물의 중간자라는 중세 신학자의 말을 빌지 않아도 인간은 동물과 공유하는 특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은 자신에 고유한 지각장을 형성하고 운동적 삶의 방식을 가지며 자연적 공간 속에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점에서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약 400만년 전에 인류의 진화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성의 비약적 발달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진화의 도약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가져 오게 하였다.

 

6. 호모 파베르(Homo faber)와 인위적 공간

  인간을 특징짓는 용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 제작하는 인간(Homo faber), 말하는 인간(Homo loquens),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 등은 각각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 주는 본질적 특성에 의해 인간을 정의하는 말들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볼 때 인류의 탄생은 직립보행, 언어와 손의 사용, 뇌의 발달로 특징지어진다. 이것들은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으며 서로 밀접한 연관 속에 있는 특징들이다. 이렇게 볼 때 위에서 열거한 인간의 정의들은 강조점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 사실상 하나의 사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사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동물과 인간이 갈라지는 분기점에서 인간은 지성(intelligence)의 비약적 발달을 목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의 과정에서 볼 때 지성은 사색의 기능이기보다는 삶의 방식으로서 나타났다. 즉 그것은 물질적 조건에 적응하고자 하는 인간적 방식의 표현이다. 그것은 뇌의 발달과 손의 사용으로부터 도구의 발명이 유래하게 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도구 제작은 아무리 초보적인 것일지라도 분석과 추론을 요하는 지성적 작업이다. 도구 제작의 목적은 인간의 본능적 혹은 유기적 불충분성을 보완하는 것이다. 동물이 자연적 힘에 의해 혹은 본능에 의해 행동하는 곳에서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낸다. 다른 동물과 달리 강인한 신체적 조건이나 본능적 생존감각을 결핍한 인간이 생존을 위해 발달시킨 능력이 도구를 제작하는 지성인 것이다. 따라서 도구를 제작하는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5).
  인간이 도구 제작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기계문명까지 이루어낸 것은 필연적 과정이아니었을지 몰라도 호모 파베르로서의 인간 본성이 그 배경에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지구 위의 인간의 생존은 물질의 속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작인으로서의 인간이 원시적인 도구 제작에 머물지 않고 그 기능을 무한히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은 또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생존방식이 본능으로부터 멀리 벗어났을 때 이미 예정된 결과였다. 본능은 직접적 행동 속에서 그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며 학습이나 추론으로 지식을 형성하기보다는 체험 속에 구체화된다. 반면 지성은 직접적 행동이 불가능한 곳에서 미리 행동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발달한다. 그것은 구체적 사물을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사물들 간의 관계와 형식을 그려 보고 분석과 추론을 행한다. 형식적 지식은 구체적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으나 대신 인식의 대상을 무한히 확장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지성의 순수한 기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기하학의 영역이다. 기하학은 추상화된 대상들과 그것들의 형식적 성격을 다루는 극한적 영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 현실 세계에서 그 추상적 과정을 적용할 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어느 덧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범형(pattern)으로 군림한다. 이렇게 해서 지성은 현실을 지배하는 열쇠를 거머쥐게 된 것이다.
  실로 기하학이란 인간 지성의 탁월한 작품이다. 기하학은 공간을 재단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공간은 질적, 지각적 소여(所與)이며 기하학에서 다루는 양적 공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기하학적 공간은 절대적 의미에서 비어 있으며 질이 없이 완벽하게 순수하고 거기서 다루어지는 형태들은 순수양이다. 이러한 순수한 특성들은 기하학적 공간이 인간 지성에 의해 구상된 인위적 공간이라는 데 기인하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손은 인간이 날 때부터 기하학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인간이 기하학자인 이유는 그가 장인(匠人, artisan)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6). 이처럼 제작인과 기하학자는 본성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이른 바 과학의 순수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논쟁거리가 충분히 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제작인으로서의 본성이 사색적 인간을 앞선다면 과학과 공학을 가르는 순수성과 응용성의 문제가 그다지 명쾌한 기준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어쨌든 삶의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는 기하학적 혹은 과학적 순수성이 그 빛을 잃는 것이 사실이다.
  기하학에 의해 공간을 조작하는 인간의 작업은 도구 제작의 기능을 무한히 연장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때의 공간이 지성 이전의 자연 상태의 공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베르그손은 많은 철학자들이 혼동하곤 했던 구체적 연장(l'étendue concrète)과 순수 공간을 명확히 구분한다7). 자연적 공간은 구체적 성질로 가득차 있는 지각장이다. 동물들은 이질적인 연장(延長)의 감각 밖에 갖지 못한다. 순수 공간이란 감각이 아니라 개념에 의해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공간에 대한 고유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가령 오른쪽과 왼쪽의 감각은 분석이나 정의가 불가능한 공간감각이다. 그런데 자연적 공간의 이질적 특성들은 다른 동물에 비해 공간감각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인간에게는 예측불가능성의 두려움을 안겨 준다. 이러한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반작용(réaction)’으로 인간 지성은 어디서나 균일하고 완벽하게 비어 있는 순수 공간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8). 이처럼 순수 공간은 자연의 이질성을 거부하고 동시에 생명에 대한 내적 인식인 본능을 거부함으로써 실재적 지속을 외재화하고 전도(inversion)시킨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9). 지성이 이런 방향으로 진화하기 시작했을 때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무한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지성의 형식적 인식은 무한한 내용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기하학자라는 말은 형식적 인식을 타고 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또한 제작인으로서의 인간은 진화를 추진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물질을 이용하여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의 양식이 물질을 인식하는 지성의 틀을 진화 과정 속에서 형성한 것이다.
  
7. 삶과 공간

  인간은 대부분의 생활을 본능보다는 지성적 판단과 추론 그리고 거기서 유래하는 예측에 의존한다. 따라서 인간은 지성적으로 분석되지 않는 영역에 있어서는 일종의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낀다. 이런 이유로 비록 지적 판단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영역에서조차 지성은 무리하게 그것을 적용하려 한다. 사실 인간의 삶은 인위적 공간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적응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걷거나, 뛰어 놀거나, 대화를 하거나 간에 우리는 자연적 공간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구부러지고 무언가 불분명한 것으로 가득차 있는 자연 속의 질적 공간보다는 기하학적 모양의 건축과 가구와 놀이기구 등을 선호한다. 비록 그러한 모양들이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일치하지 않을 지라도 우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기하학적 형태들을 통해 새로운 인공적 현실을 창조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아마도 인간의 삶의 터전인 건축의 역사는 이러한 인공적 현실의 역사와 일치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위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에 비해 불편하고 게다가 아름답지도 않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지성과 더불어 비약했을 때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자연적인 것을 초월할 능력을 갖게 되었으리라는 것이 올바른 지적일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이 우주(cosmos)를 기하학적 질서를 가진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아름다움과 조화의 상징으로 보았던 것을 볼 때 잘 드러난다. 이 생각은 대부분의 고전 예술에 나타나 있다. 인공물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인간으로 하여금 인공적인 방향으로 문명을 끊임없이 발달시키게 한 추진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양식이 이와 같은 인공물의 건설로서 완벽하게 표현될 수 있을까? 오늘날 사이버 공간의 세계는 인공적 공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 주는 듯하다. 문명의 힘에 압도당한 인류는 여전히 지성에 의해 창조된 인공적 공간에서 진보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영역에서 지성의 공간적 능력의 확장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들은 삶의 철학에서 볼 때 명백하다. 그것은 생명이 행동과 적응을 목적으로 형성한 자연적 공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반발로 지성이 형성한 기하학적 공간의 본래적 의미에서도 멀리 벗어나 있다. 기하학적 공간이 구체적 삶을 극한까지 추상하여 완벽한 정지 속에서 표상하는 것이라면 사이버 공간 속의 질주는 이 정지된 시간의 틈새를 뚫고 삶의 저 편을 엿보는 것같다. 거기서 삶은 멈추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시간을 갉아 먹음으로써 본래적 삶을 파괴한다. 삶의 철학자인 베르그손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시간적이며, 질적, 생명적 본성을 가진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해 준다. 지성의 사용으로 소진될 수 없는 인간 내부의 생명적 본성은 자연의 근본적인 질적 속성과 일치함으로써만이 실현될 수 있다.
  현대 예술이 보여 주는 혁명적 시도들은 아마도 지적으로 다듬어진 인간 문명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반발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생명적, 시간적 본성에 주목하는 예술은 더 이상 부동의 질서를 지향하지 않는다. 고전 예술은 수학적 질서와 황금분할에 기초한 정지의 미학을 추구한다. 그것은 유동하는 실재적 삶을 질료(質料) 혹은 카오스로 보는 오만한 지성주의적 철학 전통에 위치하고 있다. 예술이 그 인위성에 있어 자연과 분명히 다르다면 그리고 그 인위성의 미학이 삶을 소외시키는 것이라면 예술은 한갓 부동적인 추상적 공간 속에 던져진 파문(波文)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외되지 않은, 삶을 있는 그대로 충만하게 드러낼 수 있는 예술은 지적, 공간적 관점을 배제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베르그손은 메를로-퐁티와 같이 추상적 공간에서 자연적 공간으로의 단순한 귀환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자연적 공간은 생명력이 충만하게 발현된 행동 체계이며 추상적 공간이 자연적 공간의 극단에서 발생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진화는 창조임을 강조한다. 진화가 창조라면 지성적 공간의 탄생은 생명적 도약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렇다면 공간은 단순히 생명을 응고시키는 기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 있고 스스로 변형가능한 장이 될 것이다. 실제로 오랜 동안 지성적 공간의 모델이었던 유클리드 기하학은 20세기에 와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을 겪고 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공간의 질적 특성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그것은 지성이 자연을 공간성에 의해 이해하려는 시도의 진보를 보여 준다. 미술사에서 큐비즘은 대상을 다각적 측면으로 분할해서 한 평면에 투영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것은 고정적 형태의 회화 양식을 변형시켜 습성화된 지적 공간의 개념을 파괴하고 다층적인 면에서 공간을 재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공간성의 표현의 진보는 생명이 지성적 형태에서나마 새로운 조화와 질서를 창출할 것이라는 베르그손의 예언적 지적이 실현됨을 드러낸다. 이는 공간을 실제적으로 재단하는 예술인 건축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건축은 기하학적 단순성과 정지의 미학을 근본으로 하는 고전적 양식에 머무르지 않고 생명적 운동의 다양한 굴곡과 복잡성을 담아 내는 질적인 공간을 포착하고자 할 때 진정한 삶의 터전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지성은 직관에 의해 보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은 이제까지 자신의 기량을 그 자체로서 무한정으로 발휘해 왔지만 이제는 인간의 생명을 돌아볼 때이다. 지성의 공간적 특성은 판단하고 계산하고 추론하고 분석하는 기능이다. 그것은 감성이나 직관과 같은 생명의 창조적 힘에 의해 보완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 속에서 말라 빠진 뼈대만을 드러낼 것이다. 직관은 인간 속에서 의식된 생명적 본능이다. 지성과 본능은 생명적 힘의 같은 근원 속에서 출발하였으나 진화의 역사 속에서 나뉘어진 채로 각각 다른 방향으로 발달해 왔다. 그러나 인간 안에도 본능의 반짝임이 있고 지성과 본능은 상보적인 작용을 한다. 의식되지 않은 본능이 의식된 직관으로 개화할 때 지성의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작용은 자신의 방식으로나마 삶의 질적인 특성에 한 발짝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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