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왔다. 저녁을 먹
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주는 것이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
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시중
만을 들어주는 데에 크게 감동한 것이었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천 마
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버리고 안 계신 한 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노사의
상이다.
산에서 살아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이고 만다. 모진 비바
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
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 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사아밧티이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 앙굴리마알라를 귀의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 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
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
는 물결인 것을.(불교신문, 1968. 4. 21.)
무소유 -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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