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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

작가 약전
  톨스토이, 투르게네프와 더불어 러시아 3대 문호의 한 사람이며 깊은 사상성과
문학의 현대화의 의미에서 으뜸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 병원의 관사에서 태어났다
  원래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성은 나라에 공을 세운 것에 의해 '도스토예프스키'영지와
더불어 성을 수여 받은 러시아의 귀족의 성이었다. 그런데 18세기의 말경부터 가세가
기울어져 도스토예프스키가 출생하였을 당시에는 형편없이 몰락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귀족이라기보다 오히려 잡계급의 처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때문에 출생부터 빈민의
비참한 생활을 몸소 겪어 잘 알고 있었다.
  1848년(27세)에 무미 건조한 군대 생활에 진력이 나 사표를 제출하고 극도의 빈곤과
싸우면서 처녀작 발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듬해 봄에 동창 그레고로비치의
소개로 시인 네클라소프가 편찬하는 문집에 첫 작품을 게재하게 되었다. 이것이
비평계의 권위자인 벨린스키를 경탄시킨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 작품의 발표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누추한 하숙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 소설을 편집자인
시인이 읽어 줄지는 몹시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깊이 잠들고 있는 새벽
네 시경, 네클라소프와 그리고로비치가 찾아와서 방문을 두들겼다. 두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목을 얼싸안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당신은 진리를 계시하였소. 당신은 예술가로서 그 진리를 부여받은 것이오. 그
재능을 소중히 다루어 언제까지나 진리에 대해서 충실히 한다면 반드시 위대한
예술가가 될 것이오"
  두 사람은 그 날 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하게 되어 밤을
새워가며 다 읽었다. 그들은 서로 울고 있었다. 흥분을 참지 못한 이 유명한 시인
네클라소프는 작가를 만나서 그 감상을 전하기 위해서 밤인데도 불구하고 무명의
천재를 방문했던 것이다
  네클라소프는 '새로운 고골리가 나타났다'라고 하였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추천한 대
비평가 벨린스키는 처음에는 '요즘에는 우후죽순 같이 새로운 고골리들이
튀어나온다니까' 하고 말하며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작품을 읽은 다음 격찬하며 "그
사람을 데리고 오시오!"라고 외쳤으며 도스토예프스키를 널리 소개하였다. 그의
처녀작은 압도적인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다투어 그를 자신들의 모임에
끌어갔다
  무명의 청년은 일약 러시아 문단의 총아로서 첫 발을 내디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급속한 성공은 얼마 못가 그에게 압도적인 찬사를 뿌린 사람의
배반으로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벨린스키 일파와 그는 전혀 융합할 수 없는 타입의
인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벨린스키는 그에게 실망을 표시하였다
  그 후 그에게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겼다. 1848년 당시 파리에 일어난 1월 혁명
이래 공상적 사회주의가 유럽 전체에 풍미할 때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연구 단체가 여러 개 조직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페트라셰프스키 학회'였다.
이것은 페트라셰프스키라는 청년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저서를
연구하고 러시아의 사회 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푸리에주의의 정치 사상 연구
단체였는데 도스토예프스키도 가입하고 있었다. 당시의 니콜라이 1세의 전제 정치는
이것을 사상적인 음모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로 간주하고 벨린스키 주위에 가까이
있던 30여 명 의 젊은 자유 사상가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도 그의 형제와 함께 붙들려
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귀족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8개월 간 감옥에 갇혀 있다. 공개
심문을 받은 후 수 명의 청년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49년 12월 공공 광장의
사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공포와 싸우면서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눈에
문득 멀리 바라보이는 교회당의 금빛 십자가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는 어쩐지 거룩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군중이 떠들썩하더니
황제의 특사에 의하여 사형을 사면한다는 사면장을 휴대한 전언자가 달려왔다. 사형은
취소되고 대신 4년 간의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 받게 되었다. 사형 집행의 경험은 후에
"백치"의 주인공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 후 3일 후 쇠사슬에 묶여 시베리아로 이송되어 로글리스크의 노역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4년이라는 긴 세월을 흉폭한 살인수의 넋과 사귀며 괴로운
노역에 종사하며 무서운 고독감과 절망 육체적 고통과 싸우면서 겨우 허용된 한 권의
성경을 벗삼아 지냈다. 그 후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고관의 도움을 받아 군인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출옥하게 되었다
  1866년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지 7년만에 "죄와 벌"을 발표하였고 명성을 다시
되찾았으며 이듬해에는 안나 그리고예브나와 재혼하여 다시 외국으로 나가 살게 되었다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어떤 교활한 출판업자와 계약하여 기한까지 신작 소설을
제공하지 못하면 그의 저작권 전부를 무상으로 양도하기로 되었는데 이 기간 안으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고용한 속기사였다. 그는 4년의 세월을 독일 이탈리아 등의
객지에서 이 성실한 위안자의 따뜻한 사랑 속에 행복한 생활을 보내면서 불후의 명작
"백치" 및 "악령"과 "영원한 반려"를 발표하였다
  그는 1875년에 "미성년"을 그리고 1879-80년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발표하였다.
"미성년"은 영혼과 육체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인해 파멸한 벨시로프를 주인공으로 하여
영원한 여성인 소피아를 대립시켜 인간성의 근원적인 문제 즉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과의 대립 상극을 원숙기에 도달한 그의 예술적 수법으로 추구한 작품이며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예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이
천재의 최후를 장식하기에 알맞는 인류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해답을 준
걸작이었는데 제2부를 구상만으로 그치고 인류의 고뇌를 예술화한 그는 사망하였다.
  1880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열린 푸슈킨의 동상 제막식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설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이 축전은 오히려 그 자신의 천재 찬미를 위하여
열린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유명한 연설은 그가 행한 최후의 연설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따뜻한 인간애와 신에 대한 반항과 문제 제기였으며
인간성의 해부와 서술은 고금을 통하여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사상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그는 슬라브주의에 속하는데 그의 작품은 주로 대도시의 뒷
골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같은 시대의 문호 투르게네프가 서구의 문명을 존중한 작가인데 반하여 그는 러시아
사람의 민족성을 깊이 사랑했으며 좋은 점이나 나쁜 점이나 슬라브의 혼 그대로를 보여
준 작가였다. 그는 종교의 힘이 엄격하였던 중세기를 거쳐 근대 문명의 영향을 받아
한없이 복잡해진 러시아의 혼을 그대로 새겨 놓은 슬라브를 그려 냈다. 끝없이 깊은
넋으로 끝없이 깊은 민족 전체의 마음을 그려낸 작가였던 것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호 톨스토이와 아주 대비되는 작가이다. 톨스토이가 외적
현실이나 생활의 객관적인 묘사를 통하여 존재의 진실을 확증한데 반하여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생활과 현실의 추악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암흑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형상화했다
  크로포토킨, 로맹 롤랑 등이 톨스토이를 옹호하는 데 반하여 니체, 앙드레지드 등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단연 톨스토이를 능가하는 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의 신을 잃은 인류의 실존적 혼돈의 문제에
절실한 빛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현대적인 작가라는 것만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