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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

줄거리
  잔은 짐을 꾸리고 창가로 가 보았으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제 수도원을 갓 나온 잔은 영원한 자유의 몸이 되어 그처럼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인생의 온갖 행복을 막 손에 넣으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만약 날씨가 개지 않으면 부친이 출발을 망설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염려스러워 아침부터 여러 번 먼 하늘을 내다보았다. 잔은 열두 살까지는 집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딸에 대한 미래 설계에 의해 모친의 눈물도 돌아보지
않고 수녀원의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을 속세와 격리시켜서 남의 눈에 뛰지 않고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모르게 해 놓았다. 열 일곱 살이 되면 순결한 채로 자기에게 돌려보내 줄 것을
모친은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몸소 일종의 올바른 시의 목욕통
속에 딸을 넣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들을 걸어 다니고 기름진 대지의 한복판에 소박한 사랑의 모습과
동물의 단순한 애정 생의 청량한 법칙을 보여 주고 딸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
넋을 열어 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잔은 수도원을 떠나려는 것이다. 환하게 낯을 반짝이고 생기와 행복에
차서 한가한 낮 긴 밤 가지가지의 희망만이 떠오르는 고독 속에서 그 여자의
마음이 이미 떠돌아다니던 온갖 기쁨과 즐거운 가지가지의 우연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한여름을 이포르 근처의 절벽 위에 세워 놓은 선조 대대의 옛 성관인
레페플의 저택에서 보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 해변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에서 무한한 환희를 기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저택은 그 여자의 것으로 되어 있었고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그
곳에서 영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출발하려는 순간 전날
밤부터 쉴새 없이 내리고 있는 비는 그 여자의 생애에서 최초의 큰 슬픔이었다.
  남작 부인은 몇 해 전부터 심장 비대증으로 부쩍 뚱뚱해져서 늘 심장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숨을 몹시 헐떡거리면서 낡은 호텔의 정면 층계까지 오자 빗물이
내처럼 넘쳐흐르는 앞뜰을 바라보고
  "정말이지 제 정신은 아니로군" 하고 중얼거렸다. 남편은 늘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임자가 그러자고 한 거요. 아델라이드 부인"
  부인이 아델라이드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은 다소
놀려대는 듯한 경의를 표해서 언제나 부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억수 같은 빗발 속에서 두 필의 말 엉덩이에서는 온통 젖어 김이 나고 있었다.
  잔은 아름다웠다.
  장미빛을 띤 살결에는 우단 같은 솜털이 나고 금발 머리는 광채를 내며
물결치고 있었다. 눈은 도자기처럼 푸르고 날씬한 키에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선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명랑한 웃음 소리는 환희의 물결이
되어 사방에 퍼졌다.
  줄리앙 라마르 자작은 레페플 근처에 있는 그의 영지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모든 남성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느낌을 주었으나 모든 여성에게는 이상적인
완전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가 건강한 이마를 덮고 두터운 눈썹은 거무스레한 눈을
그윽하고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짙고 긴 속눈썹은 그 시선에 여자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은 정열적인 빛을 드리우게 했다.
  아베 피코 사제의 소개로 알게 된 자작은 바로 이틀 후에 레페플로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일부터 남작댁의 만찬에 초대받게 된 것이다.
  심장 비대증 때문에 언제나 잔심부름꾼 로잘리의 팔에 매달려 걷는 아델라이드
부인은 자작을 보면 항상 그 팔을 끼고 부인의 산책길을 걸었다.
  자작은 잔을 향해서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눈과
눈은 무엇엔가에 끌리듯이 마주치곤 했다.
  라마르 자작과 함께 남작과 잔이 에트르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배가 둑에 가까워지자 남작이 맨 먼저 뛰어내려서 밧줄을 끌어당겼다. 자작은
잔이 발을 적시지 않도록 두 팔로 안아서 내려 주었다. 그 짧은 포옹에 흥분한
가운데 두 사람이 해안의 자갈길을 올라가노라니 뜻밖에도 고기잡이 라스티크
아저씨가 남작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두 사람 귀에 들려왔다.
  "바로 이 사람이 점찍은 대로야 잘 맞는 귀여운 부부고 말고"
  그 날 밤 잔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틀림없이 그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낸 주신 사람 내 생애를 바칠 사람일까?
  그와 나는 마음과 마음이 융합되고 떨어질 수 없이 한데 어울려져 그러다
사랑을 낳을 사이일까?
  잔은 사랑하고 싶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날마다 더해 가는 것을 느꼈다. 자작
옆에 있으면 가슴이 뛰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 온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데보 남작이 외딸인 잔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침대 발치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르 자작이 우리에게 청혼을 해 왔다"
  잔은 담요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아무튼 후에 대답하겠다고 말해 뒀지 네가 저쪽보다도 훨씬 부자지만
한평생의 행복이란 돈 문제가 아니거든 자작 형편으로서는 네가 결혼한 후에도
이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되고 어머니나 나나 그 남자가 맘에 든단다. 그렇지만
네가 어떨른지?"
  잔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귀밑까지 새빨개져서 어물어물 대답했다.
  "좋아요. 아버지"
  그러자 아버지는 딸의 푸른 눈 속을 들여다 보며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
  데보 남작은 워낙 귀족 태생이어서 혁명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이며 자유주의자였다. 선량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의지가 약한 것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결점이기도 했다.
  남작이 잔을 위해서 새로 만들게 한 배의 기도식이 있던 날이었다. 자작은
몰라볼 만큼 훌륭한 복장을 차리고 왔다. 몸에 착 붙은 프록 코트에 가슴에는
레이스 장식이 보이고 에나멜 장화를 신은 그  모습은 참으로 당당한 귀족이었다.
로잘리까지도 황홀한 듯 그 자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 부부와 젊은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떠났다. 해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꽃다발로 장식한 배를 둘러싸고 있었다. 돛과 줄에 매달아 놓은 기다란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윽고 성가를 부른 뒤 사제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광경은 마치 결혼식과도
같았다.
  잔은 자작이 자기 손에 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가만히 그리고 차츰 세게
잔의 손을 죄어 왔다. 자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속삭였다.
  "잔은 당신만 좋다면 이것이 우리들의 약혼식이 되는 겁니다"
  잔은 고개를 숙였다. 아마 '네'하고 말을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때 배에
성수를 뿌리고 있던 사제는 두 사람의 손가락 위에도 성수를 몇 방울 떨어뜨려
주었다.
  짧은 약혼 기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서둘러서 결혼하고 코르시카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결혼 첫날 밤 무참히도 무너져 버린 환멸 속에서 골수에 사무치도록 절망한
잔의 푸념은 그 후로도 내내 몸에 붙어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이것이, 그래, 그이가 말하는 아내가 된다는 것이었구나? 이것이! 아니
이것이!"
  남편 줄리앙은 호텔 주인이나 하인 마차꾼 그리고 모든 종류의 상인들을
상대로 항상 다투었다. 그리고 다만 얼마라도 값을 깎게 되면 손을 비비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난, 도둑맞는 게 싫단 말이야"
  계산서가 올 때마다 잔은 몸서리나는 것을 느꼈다. 일일이 말썽을 부리면서
에누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하인들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는 귀밑까지 화끈해졌다.
  호텔에 들어서서 점심을 마치고 나면 줄리앙은 잔을 껴안고 귓전에 속삭였다.
  "어때, 잠깐 쉬지 않겠어?"
  "난, 지금 별로 피곤한 줄 모르겠는데요"
  나는 지금 당신이 필요한 거야 알겠어?"
  잔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잔은 경멸하다시피 남편을 쳐다보았다. 잔은 줄리앙을 외면하였다.
  "호텔 것들이 뭐라던 그까짓 것 문제삼지 않아"
  줄리앙에게는 수치심이라는 섬세한 신경이 전혀 없었다. 잔은 두 인간이 진정
마음 속 깊은 데까지 융합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잔은 또한 남편의 그 부단한 욕망에서 무언지 야수적인 심한 오욕 이외의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잔의 여성으로서의 감각은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고독한 것이다.
  그런데 코르시카 깊숙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따가운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만 샘터로 나섰다. 융단을 빽빽하게 깔아
놓은 것 같은 이끼 위에 무릎을 꿇은 잔이 물의 싸늘한 맛을 즐기고 있는데
남편이 허리를 끌어안고 나무통 끝으로 흐르는 물을 가로채려 했다. 잔은 한사코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며 닿았다
떨어졌다 했다. 실낱 같은 물줄기가 꺼졌다가 맞히곤 하면서 얼굴과 목과 옷,
손에 물이 튀고 두 사람의 머리에서 진주처럼 빛났다. 그러다가 뜨거운 키스
시간이 물줄기와 함께 흘렀다.
  잔은 갑자기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사랑의 영감을 느꼈다. 심장은 뛰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두 눈이 눈물에 젖은 잔은 나직이 남편에게 속삭였다.
  "줄리앙!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소리를 내어 즐겁게 웃으면서 빨갛게 물든 두 손으로 가렸다.
  그 이후의 여행은 참으로 꿈과 같았다. 그칠 줄 모르는 환희의 연속이었다.
잔의 눈에는 오직 줄리앙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찬란한 남국의 여행에서 돌아오니 노르망디는 벌써 가을이었다. 노르망디의
가을은 하염없이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잔은 몹시 지쳤다. 즐거운 추억에 넘치는 이 시골의 풍물이 자취도 없이
퇴색해 보였다. 춥고 습기 찬 나날이 어제와 똑같은 단조로움으로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줄리앙은 어느새 아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자기 역을 끝마친 배우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것처럼 아내 일에 마음을 쓰는 기색도 없고 모든 사랑의 흔적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아내의 방을 찾아드는 밤도 드물어지고 그는 재산의
관리와 살림에 몰두하여 스스로 일꾼처럼 차리고 있어 약혼 시절의 고상한
태도를 찾아 볼 길이 없었다.
  겨울이 닥쳐 왔다. 잔의 양친은 정초에 루앙으로 옮겨 갔다. 줄리앙은 극도로
인색한 본성을 나타내어 하인들의 식량에 이르기까지 엄밀히 제한을 했다. 잔이
매일 아침 빵집에 주문하던 가레트를 금하고 보통 빵으로 바꿨다.
  잔은 말다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바늘 끝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줄리앙은
하인들 급료나 그 밖의 어떠한 지출에서 얼마씩 돈을 뗄 때마다 그 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싱글거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거든 "
  쾌활하고 언제나 노래를 부르고 있던 로잘리도 달라졌다. 새빨갛던 두 볼이
혈색을 잃고 거북한 듯이 발을 끌며 걷는 것을 보고서
  "너, 어디 아프니?" 하고 잔이 물으면 으레,
  "아녜요. 부인"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로잘리는 노르망디 태생으로 잔의 젖동생이기 때문에 다른 하인들과는 좀달리
대우받고 있었다.
  정월도 다 갈 무렵에 눈이 내렸다. 하룻밤 사이에 들 전체가 눈에 덮이고 모든
나무는 다 얼어 붙었다.
  어느 날, 점점 더 변화가 심해진 로잘리가 몹시 대견스럽게 잠자리를 보고
있는 동안 잔은 난로 옆에서 발을 쬐고 있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무척 괴로운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웬일이니?"
  잔이 물었다.
  "아무 일도 아녜요. 부인"
  로잘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심한
신음 소리로 변했다. 잔은 겁이 났다.
  창백한 얼굴, 핏기 어린 흐릿한 눈, 로잘리는 두 다리를 뻗고서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러니, 로잘리 웬일야?"
  로잘리는 말 한 마디 없이 미칠 것 같은 눈으로 잔을 쳐다보며 무서운 고통에
찢기듯이 숨을 헐떡거렸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을 주고는 이를 깨물고 비명을
죽이면서 뒤로 미끄러져 굴렀다.
  그러자 아래 옷으로 무엇인지 움직여 보였다. 곧 거기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물결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목을 눌러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제 아기 울음 소리로 변했다. 가냘프고 고뇌에 찬
호소의 소리였다. 그것은 이 세상에 얼굴을 내놓은 인간의 최초의 호소였다.
  줄리앙은 몹시 격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저 계집애를 어떻게 할 셈이야? 애비 없는 자식 따위를 집에
둘 순 없어"
  "그렇지만 여보, 어디, 맡기기라도 하면..."
  "돈은 누가 치르고? 당신이 ?"
  "그야 애 아버지가 내겠지요. 그 사람이 로잘리와 결혼하면 되잖아요?"
  "애비라고? 당신은 그게 누군지 알고 있나? 알 까닭이 없지"
  "하지만 저 애를 저대로 내버려둘 순 없어요. 그건 비겁하잖아요? 이름을 물어
봐서 내가 그 남자를 만나겠어요"
  "흥 남자 이름을 대줄 게 뭐야 그리고 만일 사내가 싫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애비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있는 저런 여자를 그냥 여기 두어서는 안 돼.
얼마쯤 돈을 줘서 내쫓아야 해"
  잔은 단호히 반대했다.
  "안 돼요. 그것만은 안 돼요. 저 애는 내 젖동생이에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걸요. 우리집에서 쫓아 내다니, 안 될 말이에요. 정 그렇다면 내가 애를 키우지"
  줄리앙은 빨끈해서 외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쳤나? 그런 짓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그는 노발대발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날 오후 잔은 산파 집을 찾아 나갔다.
  로잘리는 잔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담요 밑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잔이 키스하려 할 때 절망적으로 온 몸을 떨며 로잘리는 얼굴을
피하며 거절했다. 잔은 어린애를 꺼낼 수가 없었다.
  한편 줄리앙은 아내에게 거의 말 한 마디 없이 지냈다. 이 주일 후에 로잘리는
일어나 일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잔은 어느 날 아침 로잘리의 두 손을 꼭 쥐고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자, 로잘리, 바른 대로 얘기해 줘. 저 앤 누구 애지?"
  로잘리는 또 다시 무서운 절망에 사로잡혀 주인의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쳤다.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기어이 손은 뿌리치고 미친
사람처럼 달아나 버렸다.
  온 몸이 얼어붙은 듯이 추운 밤이었다. 잔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 이불
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고 심장은 쿵쿵 울리다가 가끔
멈추는 것 같기도 했다.
  별안간 두려움에 잔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로잘리를 부르는 종을 눌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로잘리는 오지 않았다. 잔은 정신 없이 맨발로 계단 쪽으로
뛰어가 더듬더듬 계단을 올라갔다. 겨우 문을 찾아서 열었다.
  "로잘리!"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부딪쳤다.
  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보니 잠자리는 비어 있었다. 싸늘한 채였다.
  당장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잔은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면서 계단을 내려와
줄리앙을 깨우기 위해서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꺼져가는 난로 불빛에 잔의 눈에 비친 것은 남편의 머리와 나란히 베개 위에
얹힌 로잘리의 머리였다.
  잔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잔은
우뚝 멈췄다. 그러나 금새 돌아서서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뒤에서 다급하게 잔을 부르는 줄리앙의 소리가 울렸다.
  잔은 방에서 나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남편의 얼굴을 보고 남편의 거짓말을
듣기가 죽기보다도 무서웠다.
  잔은 도망쳐 버리고 싶은 격한 생각에 사로잡혀 속옷 바람으로 집을 나섰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 속을 절망적으로 달려 갔다.
  오랜 실신 상태에서 깨어나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자신으로 돌아간 잔은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는 데 따라 한없는 분노를 느꼈다.
  루앙에서 달려온 남작 부부에게 잔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노기에 불타는 남작은 당장 줄리앙에게로 뛰어가서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줄리앙은 신에게 맹세하면서 부인했다.
  "대관절 무슨 증거가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잔은 열병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겁니다"
  줄리앙은 오히려 격렬하게 화를 내며 소송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남작은
어리둥절했다.
  잔은 남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잔은
로잘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으나 남작이 그것을 거절했다. 마음이 산란할 때에
의사가 들어왔다. 잔은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로잘리를 만나겠다고 계속 반복했다.
  "진정하십시오. 흥분하시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금 임신
중이니까요"
  잔의 손을 잡고 의사가 말했다.
  머리를 얻어맞은 멍한 표정으로 잔은 생각에 잠겼다. 나의 뱃속에 애가 살고
있다. 그것이 줄리앙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한없이 슬프기만 했다.
  잔은 마침내 사제를 오게 하고 그 자리에 로잘리도 나오게 했다. 남작에게
떼밀려 로잘리는 방바닥에 쓰러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잔은 홑이불처럼 창백해져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내가 느닷없이 방에 들어갔을 때 줄리앙의 잠자리에 있었던 건 너지?
로잘리!"
  "네, 부인"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겼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처음 여기서 식사를 하시던 날 제 방으로
오셨습니다. 다락에 숨어 계셨습니다"
  "그럼 네 아인... 그 사람 거야?"
  "네, 부인"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는? 언제부터 또 시작했니?"
  "오시던 그 날 밤부터..."
  말 한마디한마디가 잔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맥이 풀리고 무한한 절망감이
전신을 감돌았다.
  그 이상 듣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나가, 어서 나가!"
  잔은 소리쳤다.
  남작이 다시 로잘리의 어깨를 붙들고 문에서 끌고 나가 짐짝처럼 마루에
떼밀어 버렸다. 남작이 얼굴이 파래져서 자리로 돌아오자 사제가 말했다.
  "참 야단입니다. 이 고장의 여자들이 다 저 모양이거든요"
  "아니, 용서 못할 인간은 줄리앙이죠. 더러운 녀석! 제 딸을 데리고 가겠어요"
  "좀 참으십시오, 남작님. 그도 그저 예사로운 일을 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남작님 자신만 하더라도 생각해 보시면 아실 텐데요. 하하하..."
  남작은 어쩔 줄을 몰라서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울고 있던 잔의 얼굴에는
미소의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사제는 좋은 기회라는 듯이 말했다.
  "부인 항상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부인에게는 크나큰 불행이 닥쳐
왔습니다. 그러나 신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큰 행복으로 이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부인은 장차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애가 부인의 위안이
될 것입니다. 잔 부인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를 봐서도 줄리앙 씨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어린애는 두 분 사이를 맺은 인연의 실마리니까요"
  잔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작은 2만 프랑에 상당하는 농장을 붙여서 사제의 주선으로 다른 남자와
로잘리를 결혼시켰다. 줄리앙은 펄펄 뛰며 아내가 상속받아야 할 재산이라고
주장했으나 남작도 잔도 들어주지 않았다.
  잔은 모든 것을 체념한 가운데 임신 기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예정보다 두
달이나 빨리 7월 말에 사내 아이를 낳았다.
  무서운 고통 끝에 인생의 목표를 잃고 있던 잔은 갓난아이의 가냘픈 울음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환희의 섬광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어린애는 잔의 열광적인 애정의 대상이 되었다. 남작 부부도 좋아서
야단이었으나 이기적인 줄리앙은 자신의 지배적인 권위를 침범하는 어린애의
존재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줄리앙은 얼마 전부터 근처에 사는 푸르빌 백작 집에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얼굴이 희고 깊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백작은 벌건 턱수염을
기다랗게 기르고 거선처럼 거대한 남자로 사냥에 미친 사람이었다.
  잔은 남편을 따라 이 부부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루이 13세 양식인 굉장한
저택은 계곡의 경사진 곳에 있었고 한쪽 돌담이 전부 커다란 연못 속에 들어
있었다. 돌층계 아래에는 배가 네 척 매달려 있었다. 백작은 그 못에서 오리를
잡기도 하고 고기를 낚기도 했다.
  잔은, 거칠기는 하지만 호인인 이 곰 같은 거인에게 호감을 가졌다. 백작은
레페플에 오면 잔의 손에서 폴을 받아 안고, 털이 난 큼직한 손으로 어린애를 잘
다루었다. 수염 끝으로 어린애 코를 간지럽히기도 하고, 어머니처럼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는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을 항상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편 줄리앙은 �혼 시절처럼 말쑥하고 단정하며 매혹적인 미남이 되었다. 그
눈에는 다시 애무하는 듯한 빛이 돌았다.
  3월이 되자 질베르트 백작 부인의 제안으로 넷이서 가끔 먼 곳까지 승마를
했다. 백작 부인과 줄리앙이 앞서고 잔은 백작과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앞서
가는 두 사람은 작은 소리로 조용조용 속삭이다가 별안간 큰 소리로 웃어대기도
하고 의미 심장한 눈초리로 은근히 서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채찍질을 하고 달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이상하게 흥분한 백작 부인은 줄리앙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연상 박차를 가해서 말을 몰았다. 그러나 갑자기 말이 우뚝 서서 땅을 차며
입에서 거품을 내뿜었다.
  "조심하지 않고 뭐야, 질베르트!"
  걱정이 된 백작이 큰 소리로 나무랐다. 부인은 백작의 말에 도전하는 듯이
오히려 사납게 채찍으로 양쪽 귀 사이를 쳤다. 훌쩍 뛰어오른 말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을 달렸다.
  백작은 나직히 신음 소리를 내더니 자기 말의 목을 안는 것처럼 몸을 굽히고
전력을 다해서 말을 앞으로 내몰았다. 말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 모양은 마치
거인이 말을 다리 사이에 끼고 날아가는 것 같이 보였다.
  두 마리 말은 쏜살 같이 달려 잠시 동안에 목장 저쪽에 조그맣게 되고 마침내
지평선 넘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잔과 줄리앙이 그 뒤를 쫓았다. 15분쯤 달리더니 되돌아오는 백작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네 사람이 만났다. 백작은 새빨개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부인은 새파랗게 굳어진 얼굴이 괴로워 보였다.
잔은 백작이 그의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백작 부인은 그 후 한 달 동안 일찍이 본 적이 없을 만큼 쾌활했다. 항상
소리내어 웃으며 충동적인 애정을 가지고 잔을 포옹했다.
  무언지 신비스럽고 황홀한 상태가 백작 부인에게 찾아든 것 같았다. 백작 역시
무척 행복한 듯이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아내의 손과 옷자락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줄리앙도 또한 아주 딴사람처럼 쾌활하고 상냥해졌다. 마치 두 집의 친밀이 곧
각자의 평화와 기쁨의 원천인 듯했다.
  그 해 봄은 유난히 더 일찍 왔다.
  어느 날 아침 잔은 조그만 흰 말을 타고 들로 나갔다. 줄리앙은 아침 일찍부터
어딘가 가고 없었다. 잔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옛날 줄리앙과 사랑을
속삭이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막 좁은 길을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잔은 그 길 막다른 데 있는 나무에
매어둔 두 마리의 말을 보았다.
  분명히 줄리앙과 백작 부인의 말이었다. 여자 장갑 한짝과 채찍 두 개가 풀
위에 떨어져 있었다.
  잔은 말에서 뛰어내려 나무줄기에 기대섰다. 바로 옆 풀 속에서 두 마리
산새가 날아 앉았다. 한 마리가 열심히 쭉지를 펴고 몸을 떨면서 상대방 둘레를
훌훌 날다가 머리를 살짝 숙이고는 울고 있더니 별안간 두 마리가 한데
어울렸다.
  "참 그래 봄이니까"
  중얼거리는 동안에 문득 어떠한 의혹이 잔의 머리에서 번쩍였다. 잔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정신 없이 말을 몰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은 어린애에게 뛰어가서 몇 번이나 키스를 했다. 잔의 그
가슴 속에는 이미 질투도 증오도 없었다. 다만 살을 찌르는 듯한 고독감과 모든
인간에 대한 불신에 괴로워할 따름이었다.
  또 다시 봄은 돌아왔다.
  지난 1년 동안 잔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어머니
아델라이드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남작 부부는 딸과 함께 따뜻한 계절을 보내기 위해 5월 20일 루앙에서
레페플에 왔었다. 어머니 모습을 대하는 순간 잔은 깜짝 놀랐다 지난 6개월 동안
남작 부인은 10년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토실토실하던 볼이 자주빛이 되고
눈은 빛이 사라졌으며 숨을 쉬기도 괴로워했다. 줄리앙까지도 그 변화에 놀랄
지경이었다.
  그 날은 도리어 보통 때보다도 몸이 좋은 편이었다. 점심 때에는 수프와
달걀을 두개나 먹고 평상시처럼 플라타너스 우거진 오솔길을 산책했다. 그런데
별안간 길에 쓰러져서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날 밤 잔은 싸늘한 어머니 손을 쥔 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잔의 희망에
따라 어머니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잔은 어머니가 운명하기 전에 예전 편지를 다 꺼내서 읽으며 울고 있던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소녀 시절 이래 할머니나 친구들한테서 받은 것이었다. 잔은 아직
그대로 있는 어머니 편지 상자 쪽으로 눈을 돌린 다음 일어나서 그것을
끌어내렸다. 갑자기 읽고 싶어진 것이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편지는 다 쓸데없는 그러나 열렬한 사랑의 편지였다.
사소한 집안 일들이 세밀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다른 뭉치를 풀어서 읽기 시작한 잔은 넋을 잃었다.
  '소생은 이제는 그대의 애무 없이는 지낼 수 없습니다. 미칠 듯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그가 나가는 대로 곧 와 주십시오. 한 시간은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소생은 그대를 열애하고 있습니다'
  '허무하게 그대를 요구하면서 괴로운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남편이 있는
당신을 생각하며 창문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격정을 느꼈습니다...'
  폴덴느마르 그 이름은 아버지가 지금도 폴 그놈이라고 부르면서 얘기하는
사람인데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제일 친한 사란이었다.
  잔은 별안간 그 편지들을 집어 던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을 느꼈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잔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까지 실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잔은 더럽게 느껴지기만 하는 편지들을 난로 속에 집어
넣어 버렸다.
  남작은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후에 루앙으로 돌아갔다.
  어린아이 폴이 병이 났다. 잔은 열 이틀 동안 한잠도 못자고 거의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냈다. 폴은 나았으나 잔은 앞으로도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죄이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하나 더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딸을 이 생각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로잘리의 사건이 있은 후로 잔은 줄리앙과 별거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남편에게는 정부가 있었다. 잔은 남편의 애무를 받기가 몸서리나도록 싫었다.
  어느 날 잔은 아베 피코 신부를 찾아갔다. 수줍은 낯으로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신부는 싱글싱글 웃었다.
  "잘 알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몸도 건강하시지요. 잘 알겠어요.
줄리앙 씨를 만나 보겠습니다"
  신부가 자상하게 마음을 써 주었지만 잔은 부끄러운 나머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불안한 1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에 줄리앙이 이상한 주름을
입가에 띄면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산책을 하는 동안 줄리앙은
아내의 귓전에 속삭였다.
  "이제 아마 우리는 화해를 한 것 같군. 나로선 마침 잘 되었어"
  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모든 인간으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는
것 같은 슬픔의 가슴을 억눌렀다. 오열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잔은 남편의 가슴에 쓰러지면서 울었다. 놀란 줄리앙은 아내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잔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옛날 관계로 돌아갔다. 남편은 그 일을 의무처럼
해치웠으나 잔은 가슴이 느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참고 견디었다.
  이번에 임신한다면 그것을 최후로 영원히 줄리앙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나 잔은 남편의 애무가 그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임신시키지 않기 위해서지"
  "어머나 왜 애가 싫어요?"
  "체! 하나면 그만이야 귀찮기도 하고 돈도 들고..."
  다시 잔은 신부한테 갔다. 신부는 마치 단식한 사나이의 식욕과도 같은
호기심으로 꼬치꼬치 캐묻더니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
  "수단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부인이 임신했다고 믿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엔 정말 임신하실 걸요"
  잔은 눈 속까지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만일 제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이웃에 소문을 내십시오. 결국은 주인께서도 믿을 테니까"
  사제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결과는 사제의 예상대로 되었다. 잔은 임신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미칠 것
같은 환희에 넘쳐 어머니를 여윈 슬픔을 겨우 잊을 수가 있었다.
  9월 하순에 아베 피코 사제가 새삼스러운 태도로 찾아왔다. 고르데빌의
수도원장으로 영전하게 되어 후임의 젊은 사제를 소개했다. 아베톨비악은 마르고
키가 작은데다 눈이 침울해 보여서 대단히 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신임 사제는 준엄하고 매서운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경멸 인간 만사에 대한 혐오 무경험에서 오는 옹졸함 이러한 모든 것이
그를 순교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사제는 결국 모든 마을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었다. 절교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격해서 성욕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서로 아니꼬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사제는 차츰 밀렵자를 쫓아다니는 산지기처럼 정부들끼리 밀회하는 것을
감시하고 방해를 놓고 해서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미사에 나가지 않게 되고
말았다.
  줄리앙은 거의 매일 푸르빌 백작 집에 출입했다. 이제는 줄리앙 없이 지낼 수
없게 된 백작과 함께 사냥을 하기도 하고 백작 부인과 승마를 하기도 했다.
  남작은 11월 중순경에 다시 잔의 집으로 돌아왔다. 골수에 사무친 슬픔 때문에
더 늙고 수척했다.
  겨울도 다갈 무렵의 어느 날, 아베 톨비악 사제가 찾아왔다. 그는 줄리앙과
질베르트와의 정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 부인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요?"
  "사제님께선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세요?"
  "한사코 이 죄를 막아야 합니다"
  잔은 눈믈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제 남편은 제 말 같은 건 들어 주지 않아요. 심부름하는 계집애를
상대해서 저를 배신할 일도 있답니다. 전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부인께선 그러고도 한 사람의 아내라고 생각하시는가요? 신앙이 있는
여성이신가요? 눈앞에선 죄를 저지르는 걸 보고서 모른척 하시다니 비겁한
마음이 부인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부인은 천주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분인
못되는 줄 압니다"
  "아, 사제님! 부디 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푸르빌 씨의 눈을 뜨게 하십시오. 이 관계를 끊는 것이 그분의 할 일이거든요"
  잔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녜요. 그러다간 그가 두 사람 다 죽이고 말아요!"
  "그렇다면 부인은 언제까지라도 치욕과 죄악 속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군요.
저는 이 이상 이런 데 있을 수가 없소"
  사제는 잔을 저주하는 듯 들고 있던 우산을 쳐들고 잔뜩 화를 낸 채 돌아갔다.
  질베르트와 줄리앙은 말을 타고 다니는 산책 도중에 늘상 사제의 모습을
보았다. 어떤 때는 들녘 끝이나 낭떠러지 위에 검은 점처럼 보일 때도 있고
때로는 두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는 계곡에서 기도책을 탐독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이윽고 봄이 왔다. 나뭇잎들이 아직 투명해 보일 정도고 들은 축축했기 때문에
질베르트와 줄리앙은 대개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에 숨곤 했다. 막사는 작년
가을 이래 보코트의 언덕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낭떠러지에서 5백 미터쯤
떨어져 있고 계곡의 가파른 비탈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온종일 맹렬한 바람이 불어대는 어느 날이었다.
  잔이 날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니 푸르빌 백작이 허둥지둥 찾아왔다.
안색이 몹시 창백해서 빨간 수염이 마치 불꽃처럼 보였다. 핏기 어린 눈은
사고력을 잃은 듯이 자꾸 움직였다.
  백작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질베르트가 여기 와 있겠죠"
  잔은 놀라서 대답했다.
  "아아뇨! 오늘은 통 안 보이셨는 걸요"
  그러자 백작은 두 다리가 잘리기라도 한 듯이 털썩 주저 앉아 모자를 벗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씻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내밀며 입을 딱
벌리고 무언가 무서운 괴로움을 호소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만두고서 상대방을 우두커니 보고 있더니 혼자 입 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뛰어나갔다.
  잔은 그 뒤를 쫓았다. 공포에 싸여 쥐어짜는 듯한 가슴을 안고 그러나 거인의
발걸음을 따를 수가 없었다.
  백작은 출렁거리는 바닷물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를 다라 한사코 달렸다.
사나운 소낙비가 퍼붓고 바람은 윙윙 소리를 내며 초목과 곡식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보코트 언덕이 보였다. 양이 없는 우리 한쪽에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가
있고 말뚝에 말 두 마리가 매어 있었다.
  백작은 당에 엎드려 그 막사 옆으로 접근해 갔다.
  두 마리의 말은 백작의 모습을 보자 몸부림쳤다. 백작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로 고삐를 끊었다. 말은 바람과 함께 뛰어갔다.
  백작은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켜 문 틈에 눈을 딱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백작은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일어났다. 이어 밖에서
대문 빗장을 힘껏 밀어 넣자 두 손에 막대기를 쥐고 흔들어 댔다. 그러다가 그는
상체를 구부리고 죽을 힘을 다해서 황소처럼 끌기 시작했다.
  오두막 안에서는 주먹으로 판자를 두들기며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은 비탈의 절벽까지 오자 꼭 쥐고 있던 두 손을 놓아버렸다. 오두막은
비탈을 구르기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제 무게 대문에 더 속력이 가해지며 살아 있는 것처럼 뛰고
부딪치고 하면서 굴러갔다. 안에서는 무서운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움푹 팬 곳에서 한바탕 곡선을 그리며 훌쩍 뛰어오른 그 다음 순간
깊숙한 땅에 여지없이 떨어져 마치 달걀처럼 부서져 버렸다.
  끔직한 두 시체가 그 속에 깔려 있었다. 남자의 이마에는 구멍이 뚫리고
얼굴은 형편 없이 깨져서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여자는 턱이 빠져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부러진 손발이 뼈가 없는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참사를 폭풍우를 피하려고 뛰어들어 간 오두막이 거센
바람에 뒤집혀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날 밤 잔은 죽은 아이를 낳았다. 계집애였다.
  잔은 석 달 동안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몹시 몸이 쇠약하고
조그마한 소리만 들어도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잔에게는 오직 폴이 전부였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되어 아브르의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집 안에는 그래도
평화와 사랑의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는 남작도 남작 부인의 동생으로 늙은 독신인 리존도 리페플에 와서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폴은 세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리광을 부리며
자라났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된 시월 어느 날 아침 그는 세 사람의 전송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아브르로 출발했다. 그는 생후 처음 가족의 손을 떠나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 날 밤 레페플에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큰 소리를 내며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어둠 속을 달렸다.
  그러나 폴은 이윽고 이틀만에 한 번씩 만나러 오는 어머니가 그다지 반갑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보다도 처음 사귄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것이다.
학교측에서도 면회를 금했다. 잔은 하는 수 없이 폴이 돌아올 휴일을 고대하며
살아야 했다.
  폴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금발의 아주 훌륭한 남자가 되었다. 그러나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낙제를 두 번씩이나 하고 겨우 수사과에 올라 갔을 때는 벌써 스무 살이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휴일에 어머니에게로 돌아오는 습관을 차츰 게을리 하게
되고 어떻게든지 구실을 붙여서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아침에는 초라한 옷을 입은 유태인 노인 하나가 잔에게 면회를
청했다.
  "마님께 보여 드릴 쪽지를 가져 왔습죠"
  노인은 대 묻은 쌈지 속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내어 잔에게 주었다. 그것은
폴의 사인이 들어 있는 차용 증서였다.
  잔은 전신이 떨렸다.
  폴은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불량 소년들과 함께 도박장에 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즉시 아브르로 향했다. 그러나 학교에는 이미 한 달이나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교장이 잔의 사인이 있는 편지 네 통과 의사의
진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다만 놀랄
따름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읍내 여관에서 자고 이튿날 경찰의 손을 빌려 시중에 숨어
있는 여자한테서 폴을 찾아 냈다. 그들은 이 젊은이를 데리고 레페플로 돌아왔다.
잔은 도중 내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으나 폴은 실로 태연한
낯으로 창밖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폴은 시골에서 번들번들 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배를 타고 아브르로 도망쳐
버렸다. 경찰이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시는 폴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전 여자 역시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잔은 어느덧 백발이 되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무 걱정 말아 주십시오. 저는 지금 런던에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옹색해서 먹을 것조차 없는 날도 있습니다. 저와 같이 있는
여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유산에서 1만 5천 프랑만 미리 쓰게 해 주십시오. 얼마 후에 저도 성년이
되니까요...'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있던 잔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아들의
행동을 용서하고 돈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아들과 함께 있는 여자에 대한 증오는 악착스러우리 만큼 큰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섯 달 동안 또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년에
달한 아들의 대리인이 느닷없이 나타나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청구했다. 12만
프랑을 받은 폴은 그 후 여섯 달 동안에 간단한 편지 네 통을 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날아든 절망적인 편지가 세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머님 저는 지금 막다른 데까지 왔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자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폴의 편지는 또 8만 5천 프랑을 청구해 온 것이다.
  토지를 저당해서 돈을 보내 주었더니 1년쯤 있다 "폴드라마르 주식회사"라는
기선 회사가 파산했다는 통지가 왔다. 결손은 23만 5천 프랑이었다.
  남작은 저택과 두 농장을 저당에 넣고 최후의 수속을 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졸도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겨울이 다간 어느 날 리종 이모가 기관지염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잔은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괴로워할 것 없이 자기도
죽어버리고 싶다고 빌면서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건장한 농촌 여자 하나가 잔을 번쩍 안아 들고 집으로 데려왔다.
  "당신은 누구지...?"
  밤중에 눈을 뜬 잔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면이 있는 그 얼굴을 쳐다보면서 물어
보았다.
  "가엾은 잔 부인! 저를 몰라보시는가요?"
  "앗, 로잘리!"
  잔은 정신없이 로잘리를 얼싸안고 키스했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은 채
언제까지나 흐느껴 울고 있었다.
  로잘리도 이미 남편이 죽고 줄리앙의 아들은 장가를 들여서 훌륭한 일꾼이
되어 있었다.
  로잘리는 집을 아들 내외에 넘기고 외로운 잔을 돌보아 주기 위해서 24년만에
레페플에 돌아온 것이다.
  잔은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하고 오랫동안 정든 저택을 팔아서 조그마한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로잘리는 여러 가지로 잔을 위로하고 시중해 주었다. 사실
잔은 이제 아주 늙어 버렸고 슬픔에 지쳐 소생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왜 나는 남처럼 사랑을 받지 못했을까? 왜 나는 조용한 행복마저도 은혜받지
못했을까?"
  잔은 자신의 불행한 일생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힘없는 한숨을 내쉬는 날이
계속되었다
  돈을 보내 주면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귀여운 내 아들아 나는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오도록 간청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늙고 병들고 일년 내내 하녀 하나밖에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는
것을 생각 좀 해다오. 나는 지금 큰 길가의 조그만 집에서 살고 있단다. 참 슬픈
일이다. 그러나 너만 있어 준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너밖에는 없으면서도 칠 년 동안이나 너를 못 만나 보고 있으니...네 어미는
얼마나 불행했었는지 얼마나 내 마음을 네게 의지해 왔었는지 너는 도저히 모를
것이다. 너는 나의 생명이었다. 나의 꿈, 오직 내 하나의 희망, 내 하나의
사랑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배반했고 또 나를 버리고 말았구나 아아!
돌아와다오. 나의 귀여운 폴아 돌아와서 네 어미에게 키스해다오. 절망의 팔을
내밀고 있는 네 늙은 어미의 곁으로 돌아와 다오. 잔'
  '그리운 어머님, 진작 편지를 드리지 않은 것은 파리에 소용없는 여행을 하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자신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찾아뵈어야만
했기 때문에 저는 현재 몹시 불행한 처지에 빠져서 대단히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 처는 사흘 전에 계집애를 낳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동전 한푼도
없습니다. 애는 문지기가 간신히 키우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어린애를 길러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죽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가 됩니다. 어머님이 맡아 주실 수는 없을까요? 정말이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유모에게 맡기자니 돈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대로 곧 회신을 바랍니다. 어머님을 사랑하고 있는 아들 폴'
  잔은 의자에 맥없이 앉아서 로잘리를 불렀다.
  "제가 아이를 맡지요. 부인 아무래도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로잘리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해 줘, 로잘리"
  "그리고 공증인한테 갑시다. 아드님 결혼 수속을 해야 해요. 만약에 그 여자가
죽는다면 어린애의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로잘리는 그 날 밤 곧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사흘만에 돌아왔다.
  "그래 어땠어?"
  잔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죽었어요. 결혼식은 올렸답니다. 아드님은 장례식을 마치고 오실
거에요. 이게 손녀입니다"
  이불에 싸여 보이지 않는 갓난애를 내밀었다.
  잔은 '폴'하고 중얼거릴 뿐 입을 다물었다.
  잔은 허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포근한 온기가 생명의
체온이 잔의 옷을 통해서 다리로 전해 오고 살 속까지 스며들어 왔다. 그것은
무릎 위에서 잠들고 있는 어린 것의 체온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감동이 잔의 온 몸에 파고들었다. 잔은 왈칵 아직 보지 못했던
어린 것의 얼굴을 덮은 헝겊을 벗겨 버렸다. 자식의 딸 그러자 이 연약한 것이
불안에 싸인 채 심한 광선을 받고 입을 움직거리면서 파란 눈을 떴을 때 잔은 품
안에 들어올리고는 꼭 껴안고 빗발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로잘리는
무뚝뚝하면서도 즐거운 낯으로 그것을 말렸다.
  "자, 자. 부인, 그만 좀 두세요, 그러시다가는 울려요"
  로잘리는 아마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답하려 하는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