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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3대 법흥왕은 왕의 권한이 약해 불교를 받아드이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 때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고, 불교 공인은 왕권 강화의 기틀이 되었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무려 150년 가량 늦은 527년 법흥황 때였다.
법흥왕은 홍륜사라는 절을 지으려다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때, 신앙심에 불타는 젊은 신하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죽기 직전 "내가 죽은 뒤에는 반드시 이변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침내 이차돈의 목을 베자, 잘린 목에서 하얀 피가 솟구치며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꽃비가 내렸다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귀족들은 더 이상 불교를 반대할 수가 없었고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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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2.11.16
21:19:52 (*.131.13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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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댓글

이규

2012.11.16
21:23:19
(*.131.135.137)
역사에서 고구려(소수림왕2년;372), 백제(침류왕1년;384)가 왕실에 의해 불교를 수용했던 것과 같이 신라의 불교 또한 수용의 주체에 있어서는 왕실이었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가량 늦은 법흥왕(528년)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이미 그 이전부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 온지 40 - 80년 후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들어온 듯 하며 그 경로가 공식적이지 못한 터라 은밀하게 포교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불교는 기복 신앙의 형태였고 공인되지 못한다. 그러다가 향의 전래를 계기로 왕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신라에서 나타난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갈등은 두 가지로 파악된다. 첫째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들 수 있다. 이차돈 등의 불교도의 불교 공인 요구와 왕권 신장 및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배 이념을 필요로 하는 왕권의 요구가 상응한데 반해, 부족 합의제의 고수를 지향하는 전통 귀족 세력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승인요구를 극력 거부하였던 것이 그 형태이다. 둘째로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들 수 있는데, 법흥왕의 불교 승인 요구에 대하여 귀족층과 전통 부족 세력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승려들의 머리모양, 옷차림새 그리고 그들의 언변에 상당한 비난을 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었는데 그 과정상 결코 순조롭지는 못했다.
법흥왕 때 (527년) 귀족들의 봉불(奉佛) 반대 주장에 대하여 이차돈(異次頓)은 자신의 목을 베어 분분한 의견을 결정토록 자청했고, 이차돈은 죽음에 임하여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는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당신께 신(神)이 있다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이적을 행하소서." 이런 말을 끝으로 처형되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피가 솟구쳤고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나 중신 귀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이차돈의 죽음을 그대로 종교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일연은 정치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주체는 대왕(大王) 이었고 그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은 군신(群臣) 들이었다. 즉 법흥왕이 그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써 그 일을 벌였고 봉불을 반대하던 군신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게 하여 그네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흰 젖빛의 피 ' 는 신화적 기술 양식의 일종으로 당대 왕 측근들에 의해 조작된 풍문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 수용 정책을 강력히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부족합의제를 지향하던 귀족층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고 중앙 집권적인 왕권 전제 통치를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지방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하기 위하여 부족 연맹체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재래 신앙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용 과정상의 갈등은 왕권의 지원과 불교도의 재래 신앙과의 융화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무마되고 극복되었고, 재래 신앙은 대체로 불교 신앙에 흡수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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