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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은 12세 어린 나이에 호랑이를 사냥할 정도로 용맹스러웠다.
391년 5월 고국원왕이 세상을 떠나자, 17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영락" 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고구려의 위세를 만방에 떨치기 시작했다.
광개토 대왕의 영도 아래 계속해서 정복활동을 벌인 결과, 지금의 러시아와 중국 일부 지대가 당시의 고구려 땅이었을 만큼 광대한 영토

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 대왕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쉴새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중국 또한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이 틈을 노려 광개토 대왕은 대규모 전복전쟁을 계획했다. 392년, 광개토 대왕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여 임진강 일대

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395년 에 북쪽의 거란을 점령하고, 398년에는 중국 산서성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고구려인 46만 명을 이주 시켰

다. 그 후에는 부여와 말갈까지 정복을 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북으로는 흑룡강, 남으로는 임진강,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내몽고와

중국 동북지방에 걸친 대제국이 되었다. 그가 죽은 다음 국토를 많이 넓힌 왕이라는 뜻에서 그를 광개토 대왕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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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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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

2012.11.16
21:45:42
(*.131.135.137)

고구려 제19대 왕(391~412 재위).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정력적으로 수행하여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보였다. 본명은 담덕(談德).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한다.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91년 즉위했다 (→ 색인 : 고구려의 대중국전쟁).

정복사업  즉위초부터 예성강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던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392년 7월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10월에는 사면이 가파르고 바다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이라던 관미성(關彌城)을 20여 일 만에 함락시켰다. 394년 7월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에서, 395년 8월에는 패수(浿水)에서 각각 격퇴하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396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해로로 임진강 방면에 진출하여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해서 58성 700촌락을 쳐부수고,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에게 항복을 받고 많은 전리품과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아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백제는 399년 임나가야(任那加倻), 안라(安羅), 왜(倭)의 연합세력과 함께 신라를 공격해왔으며, 404년에는 다시 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대방고지(帶方故地)를 침공했다. 광개토왕은 5만의 병력을 보내 신라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고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몰아냈다. 아울러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40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서쪽으로도 진출하여 랴오둥[遼東] 지방을 놓고 후연과 싸웠다. 당시 고구려는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과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후연과는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400년 후연왕 모용성(募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략하자 양국관계는 악화되었다. 이에 402년 랴오허[遼河]를 건너 멀리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募容歸)를 도망치게 했다.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성을 비롯한 랴오허 동쪽지역을 차지했다. 이는 전국시대 연(燕)에게 잃었던 고조선의 땅이 700여 년 만에 고구려에 의해 회복된 것이었다. 그뒤 405년 후연왕 모용희(募容熙)의 요동성 침입과 406년의 목저성(木抵城) 침입을 물리치고, 산둥 성[山東省]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남연(南燕)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후연을 견제하고 랴오허 동쪽지역을 더욱 확고히 장악했다. 그러나 서방으로의 진출은 408년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北燕)과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밖에도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거란에 잡혀 있던 고구려인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시라무렌 강 방면의 거란으로 추측되는 비려(碑麗)를 친정하여 염수(鹽水) 방면의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했다.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켜 북쪽과 동쪽으로 영역 내지 세력권을 확장했다. 이리하여 재위기간중에 64성과 1,400촌락을 정복했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랴오허,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중국민족과의 뼈저린 투쟁의 목표이던 랴오둥을 완전히 차지하고 또 동북의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다.

내치

또한 내정의 정비에도 힘써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하여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했다.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기도 했다. 그의 능(陵)과 생전의 훈적(勳績)을 기록한 능비(陵碑)가 414년에 건립되었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輯安縣]에 남아 있다.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http://members.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2g122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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