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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가 되다
  -프랑스, 제1제정 시작(180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01년/신유박해로 천주교인 다수 체포, 황사영 백서사건
  1804년/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시작, 평양, 대화재 발생
  1811년/홍경래의 봉기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수많은 영웅을 낳았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지도한 카미유 데
물랭, 혁명시인 파브르 데글랑틴, 의사 출신으로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던
마라, 웅변가 당통, 자코
뱅 당의 영수로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된 로베스피에르  등등,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서릿발 같
은 혁명의 제물이 되어 암살당하거나 길로틴 아래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 혁명의 와중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마침내는
황제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이탈리아 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해군장교가 되고 싶었지만, 식민지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육균사관학교
에 지원, 포병장교가 되었다. 기병이나 보병장교는 귀족가문 출신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의 사고나학교 졸업성적은 58명 중 42번째로 썩 좋지 않았으나, 역사와
수학만큼은 뛰어났다.
   1791년 22살이 된 그는 자코뱅 당에 가입, 정권을 잡고 있던 자코뱅
정부의 포병 연대장이 되
었으며, 2년 후인 1793년 툴롱 전투에서 영국군을 섬멸, 일약 국민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795년 세칭 테르미도르 반동, 즉 자코뱅 당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 처형당하
는 사건이 일어나자 나폴레옹도 체포되어 2주일간 감옥생활을 했다.
   풀려난 그는 파리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여  재기의
기회를 얻고, 이어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대프랑스 동맹의 중심세력인 오스트리아를  원정키로
하고 군대를 파견했는데,
나폴레옹이 그중 이탈리아 방면의 제3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제1, 제2군은 모두 오스트리아에게 패했으나 나폴레옹이  이끄는
제3군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
리아를 평정하고,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육박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굴복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 벨기에와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프랑스의  적은
영국만 남은 셈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번엔 이집트 원정을 당행했다. 이는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
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악화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는 3만 5천의 군대와 3
백 명의 과학자들을 데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카이로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대동한 학자들
은 이집트의 동식물, 풍속 등을 조사하는 한편, 귀중한 문화재와 고대
유물들을 프랑스로 가져갔
다. 유명한 로제타 돌도 이때 발견된 것이다.
   그 무렵 프랑스는 위기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위협
했으며 온건 공화파인 지롱드 당이 이끄는 총재정부는 지도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몰래  이집트에서 돌아와 동생  루시앙의 도움을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1799년 11월, 혁명력으로 브뤼메르 18일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라고
한다. 그는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붙였다. 새 헌법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통과되었고, 나폴레옹은 수석 통령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프랑스 민중은 안정과 질서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프랑스 인의 자존심을 드높
여준 위대한 영웅이었으며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같은  바람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듯,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또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1802년에는 숙적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평화를
맞은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종신통령에 임명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04년
나폴레옹은 국민투표에
의해 마침내 황제가 되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프랑스가 불과 10년 만에 다
시 황제를 허락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이 낳은 개혁을 일정 정도  받아들여 '나폴레옹 법전'을
만드는 한편, 정복지에
혁명의 대의를 전파시켜 '정복자'아닌 '해방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힘을 썼다. 유럽 전체가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으나, 유독 영국만이
우수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버티고 있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
럽 국가들과 영국과의 교역을 일절 금지시켰다. 그러나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생활필수
품을 수입하는 러시아는 이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통상을 재개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1812년 50
만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긴 했으나 그곳은 유령의 도시처럼 텅비어
있었다. 게다가 화재로 식
량은커녕 잠잘 곳도 제대로 얻지 못한 나폴레옹 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처참한 후퇴였다. 몰아치는 눈보라, 시시때때로 습격해오는
카자흐 병,  살을 에이는 추위
와 굶주림 속에서 프랑스 군은 쓰러져갔다. 나폴레옹도  말을 버리고
걸어서 간신히 러시아 국경
을 넘어섰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의
 군대들이었다. 이들은
1814년 파리를 점령하고 나폴레옹을 체포,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시켰다.  새 황제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1815년 2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파리로 돌
아왔다. 루이 18세는 허둥지둥 도망을 쳤고, 전 유럽은 다시 나폴레옹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모
았다.
  그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에게 패하고
말았다. 재집권한 지 꼭 ㅂㄱ
일 만의 일이었다. 백일 천하는 끝나고 나폴레옹은 이번엔 대성양의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로 유
배되었다. 영국군의 감시하에서 5년 반에 걸친 울분의 나날을 보낸 그는
1820년 5월 마침내 그곳
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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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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