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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르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독일, 종교개혁과 농민전쟁(15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10년/삼포왜란
 
  16세기 초는 독일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시기였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토마스 뮌처의
재세례파 운동과 농민전쟁이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따로
떠러진 것이 아니라 상
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그가 95개조의 반박문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데서
부터 시작된다. 면죄부란, 이것을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증표인데, 사
실은 성베드로 사원을 지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이 짜낸
묘안이었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로 있던 마르틴 루터는 교회 벽에 마틴
어로 쓴 95개조의 반박
문을 내걸어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맹령히 비판했다.
  '...제6조, 교황은 신이 용서한 바를 선언하고  확증하는 외에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없다. 제27
조, 그들은 돈궤 속에 던지 돈의 소리로 영혼이  천당에 간다고 설교한다.
제37조, 참다운 기독교
인은 교회의 축복을 나누어 갖는다. 이것은 사면장 없이 신이 그에게 내려
준 것이다...'
  그의 반박문은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주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4주일 만에 국
경을 넘어 유럽 전체에 알려졌다.
  1520년 그는 3편의 논문을 발표, 교황과 성직자의 부패, 타락을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이 파문
을 경고했지만 루터는 교황이 보낸 칙서를 불살라버리고  말았다. 1521년
마침내 그는 파문을 당
했다. 독일 황제 카를 5세 역시 그를 국법의 보호 밖에 둔다는 선고를
내렸다.
  루터는 황제의 경쟁자인 작센 공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숨어지내야
했다. 이때 루터는 라틴
어로 쓰인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이듬해 출간했다. 이제껏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가
일반민중에게 널리 읽히게 된 것이다.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교회나 성직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라고 주장했다. 그 신앙의 근거는 (성서)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것은 농민들이었다. 교회의
횡포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농민들에게 루터는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루터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로 토마스 뮌처가 있다. 그는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에서 신학
을 공부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감명을 받았다.  루터의 소개로
츠비카우에서 목사가 된 그는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원시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이상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
를 지상에 실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루터와 결별한 뮌처는 아르슈테트로  가 설교에 힘썼다. 군주,  지배자,
부자를 비판하는 그의
설교를 듣고 농민과 광부들은 깊은 공감을 느꼈다.
  1523년 뮌처는 튀빙겐에 정착, 다음해 그곳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의
선두에  섰다. 1525년 튀빙
겐에서 시작된 농민전쟁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농민군의
요구사항은 총 12개 조
항이었다.
  '제1조 민주적인 교회 운영, 제2조 십일조 거부, 제3조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농노제 폐지, 제4
조 사냥과 고기잡이의 자유, 제5조 자유로운 벌목, 제6조 세금 증대 거부,
 제7조 부역 증대 거부,
제8조 토지세의 적절한 징수, 제9조 영주  마음대로 하는 처벌 금지,
제12조 이러한  조항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 허가'
  그러나 루터는 농민전쟁에 매우  냉소적이었다.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는
 농민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만인을 평등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정신적 왕국을 현세의
왕국으로 개조하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 없인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지주고 나머지는
농노여야 하며, 어떤 사람응 왕이고 나머지는 신하가 되어야 한다.
  농민전쟁은 1525년 가을 진압되었다. 루터는 특히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에 대해 신랄한 비난
을 퍼부었으므로 이에 힘을 얻은 봉건귀족들은 무자비하게 농민군을
진압했다.
  '반도들은 유해유독하며 악마의 화신이란 점에서 그들보다 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
을 명심하라. 그대들은 농민반도들을 죽이기를 마치 미친 개를 때려잡듯
해야  한다. 만약 그대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대를 공격할 것이면 그대의 토지를 모두
뺏어갈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귀족들에게 호소했다.
  농민들은 이제 그에게 등을 돌렸다. 뮌처가 지도한  재세례파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뮌처도 1525년 참수형에
처해졌다. 최후까지 저항한 일단의  사람들 역시 1535
년 뮌스터에서 전멸당하고 원시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실현해보려던
또하나의 종교운동은 막을 내
렸다.
  한편 농민의 지지를 잃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봉건제후와 도시민의
지원하에  계속되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대타협을 이룸으로써 공인되었다. 이로써
카톨릭이 아닌 루터 교가 성
립,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루터 교를 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 부르고 카톨릭은 구교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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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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