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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백성을 위한 글, 한글
  -조선,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419년/세종 즉위
  1441년/측우기 제작
  1447년/'용비어천가' 완성
 
  한 민족의 말과 글은 민족의식의 표현이요 상징이다.  예로부터
정복자는 자신의 말과 글을 강
요함으로써 피지배민의 의식과생활 감정을 통제하곤 했다.  어떤 말과
글을 쓰느냐가 사람들에게
얼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자신의 글을 갖게 된 것은 1446년 조선  제4대 왕 세종에
의해 한글이 제정, 반포
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중국의 한자를  빌어서 우리말을
표기해왔다. 그러나  우리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외국의 문자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따랐다.
  우리말은 우랄 알타이 어에 속한다. 북아시아ㅅ 우랄  산맥과 알타이
산맥 주변에서 살던 사람
들이 쓰던 말을 언어학에서는 우랄 알타이 어라고 부른다. 그중 알타이
족의 일단이 동쪽으로 이
주, 한반도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바로 우리 민족의 조상이다.
  고대의 우리말은 크게 북방 한어, 남방 한어로 나뉜다. 만주와 압록강
일대에 살던 집단이 쓰던
부여어, 함경도 일대의 옥저어, 강원도 일대의 예맥어는 북방 한어에
속하고  경상도 동해안 일대
의 진한어, 충청, 전라 일대의 마한어, 낙동강 하류 일대의 변한어는
남방한어에 속한다.
  북방한어는 고구려의 판도하에서 고구려어로 통일되고, 남방한어는
백제, 신라어로 각각 통일되
었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말이 커다란차이를 가진 건
아니었다.
  그러다가 7세기 신라에 의해 부분적이나마 한반도가 통일됨으로써
신라어가 중심을  이루게 되
었다. 고려와 조선의 건국은 말의 중심을 중부지방으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고유의 말은 있지만 그 말을 표기할 문자를 갖고 있지 못했던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중국
의 한자를 빌어다 우리말을 표기해왔다. 신라의 학자 설총이 만든 이두나
고려 때 향가를 표기한
향찰은 모두 한자로 우리마를 보다 더 온전히 나타내려는 몸부림이었다.
  1443년 12월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을 완성했다.  그후 3년
동안 실제 사용여부를 실험
한 뒤, 1446년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과 함께 정식으로 반포했다.
  한글 만들기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도 젊고 유능한
인물만을 골라 세종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연구가 진행되었다.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강희안,
박팽년, 이개, 최항, 이현
로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몽고의 파스파 문자를 비롯하여 여러 외국
문자들을 연구한 끝에 한글
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한글은 양반유생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올린 상소를 보
자, 그는 반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중국과 동문동궤를 이룬 마당에 새로이 언문을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에 부끄럽고, 둘째,
우리말이 중국의 방언으로 인정되는데, 방언으로 하여 따로이  글자를
만든 예가 없습니다.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장 등이 제 스스로의 글자를 갖고 있으나 이들은
오랑캐니 어찌 오랑캐와 같
아지겠습니까? 셋째, 이두는 한자에 어조사만을  더하는 것으로
한문보급의 방편이  되기도 하나,
새 글자를 만들면 한문을 배우는 이가 없어져 힘들여 성리학을 배울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넷
째, 언문으로 글을 쓰면 옥사가 공평하게 될 것이라 하나 형옥의 공평은
옥리에 달린 것입니다. '
  지금으로선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지만 당시 유생들의 사고방식은
이처럼  철저히 사대적
이었다.
  어쨌든 세종은 반대세력을 누르고 1446년 9월 한글 스물 여덟자를
세상에 발표했다. 해설서 '훈민정음'의 서문을 보자.
  '국어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
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
용에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
  한글은 유생관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모르고  살던 일반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좀
더 효율적으로 민중을 다스리려는 통치술의 일환으로서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글이 완전히 일반민중에게 보급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글은 언문, 여자들이
나 쓰는 글이라 하여 몹시 천대를 받았다. 한글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일본
과 서구열강의 침입을 받으며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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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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