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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궁녀에서 여황제로
  -중국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69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660년/백제 멸망
  668년/고구려 멸망
  676년/통일신라 시작
  699년/발해 건국
 
  역사를 더듬어보면 여성으로서 최고 통치자가 된 예가 적지 않다.
신라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에카테
리나 여제 등은 남성보다 훌륭히 한 나라를 다스린 여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왕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치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이에 비해, 중국의
측천무후는 상인의 딸로서 일개 궁녀가 되었다가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녀의 본명은 조, 성은 무,  산서성 문수현에서 목재상의 딸로
태어났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는 태종의 부름을 받아 궁궐로  들어갔다.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라는
이름을 내리고 궁녀로
삼았다. 그녀의 나이 14살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랑이라고
부르곤 했다.
  정관 말년(649), 태자 치는 병석에 누운 태종을 병문안 갔다가 곁에서
시중들고  있는 아리따운
미랑의 자태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태종이 병사하자 태자 치가 제3대 고종황제가 되었다. 미랑도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소
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소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의 야심은 황후가 되는
것이었다.  우선 라이벌인
소 숙비를 제거하고, 다음엔 황후 왕씨를  모함하여 황후 자리에서
내쫓았다. 두 사람은  곤장 백
대에 수족이 잘리고 술항아리 속에 넣어져 죽음을  당했다.고종은 무
소의를 황후에 책봉하는 문
제를 중신회의에 부쳤다. 본래 황후는 명문귀족 가문에서 뽑는 것이
상례인데다 무소의는 선왕의
궁녀였던지라 신하들의 반대는 매우 드셌다.
  그러나 고종은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였다. 655년, 그녀의  나이 32살
때의 일이다. 이후 그녀는
측천무후로 불리게 되었으며,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원로대신 저수량과
장손무기는 좌천 또는 유
배되었다가 죽고 말았다.
  꿈을 이룬 그녀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타고 난
정치가였다. 고종은 지병인
간질병 때문에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어 그녀가 대신 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훌륭하게
일처리를 했기 때문에 고종은 현경 5년(660) 정무를 아예 그녀에게
위임해버렸다.  그러자 사람들
은 고종과 무후를 가리켜 '2인 천자'라고 했다.
  측천무후는 현경 5년 소정방을 파견,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무너뜨려 양제
나 태종도 이루지 못한 숙원사업인 한반도 정복을 달성했다. 이로써 당의
영토는 건국 이후 최대
로 확장되었다. 674년 그녀는 지금까지 사용해온 황제,  황후라는 칭호를
천황, 천후로 바꾸고 연
호도 상원이라 고쳤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야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신당서' 본기를 보면, '기해에 천후, 황태자를 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황태자 홍은 그녀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엔 별반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675년 황태자 홍은 유폐되어 있는 의양공주, 신성공주 두 사람을
결혼시킬 것을 고종에게 상주,
윤허를 얻었다. 두 공주는 무후에게 살해당한  소 숙비의 딸들이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직후
별안간 황태자 홍이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노한 무후가 홍을 독살했다고
믿었다.
  뒤를 이어 무후의 둘째 아들 현이 황태자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무후의 언니 한국부인
의 소생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모반 혐의를 쓰고
자리에서 쫓겨나 자결하
고 말았다.
  683년 고종이 죽자 셋째 아들 현이 황제가 되니 이가  제4대 중종이다.
한데 중종은 즉위한 지
1년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황후 위씨의 전횡에  분노한 측천무후가
중종을 황제자리에서 내쫓은
것이다.
  그리하여 690년 측천무후는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나이
67살, 중국에 최초의 여황
제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나라 이름을 주라 고치고, 낙양을 신도라 하여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다. 스스로를 신성
화제라 칭하고 넷째 아들 단을 황태자로 정하여 성을 무씨로 고쳤다. 또
측천문자라는 새문자 20
를 제정했다.
  그러나 15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705년 측천무후가 병들어 눕자, 재상
 장간지가 쿠데타를 일
으켜 쫓겨난 중종을 다시 황제로 추대하고 당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그해
겨울 측천무후는 82세
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무후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다. 이번엔 중종 비
위씨가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며 고기만두에 독을 넣어 남편 중종을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위씨의
야심은 불과 며칠 가지
못하고 단의 셋째 아들 이융기에 의해 무산되었다.
  712년 이융기가 예종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가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정치를 안
정시키고 국력을 키워 '개원의 치'란 칭송을  들었으나, 양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정사를 게을리하
다가 안녹산의 반란으로 황제 자리를 양위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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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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