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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1 19:33

셀라비 조회 수:2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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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기대지 못하는 불운한 사람

그는 “일주일 뒤 병원에서 다시 전화가 왔길래 ‘급한 일이 있어 못 간다’고 끊었지. 옆에서 듣고 있던 안식구에게 뭐라도 한마디 해야겠어서 ‘아귀찜 먹으러 가자’고 했지, 그걸로 치료 이야기는 끝났어” 했다.

―마치 남 얘기 하듯 하시네요.

“자기를 남처럼 대해야 소설이 써지는 거야. 내가 죽는구나 싶으니까 집중이 얼마나 잘되는지 몰라. 예전엔 한두 시간 정도 쓰면 됐다 했는데 요즘은 그게 아냐. 하루 종일 일하게 돼. 인생 마지막인데 게으를 수 있나. ‘역사 속의 나그네’ 세 권(4∼6권) 매듭짓고 세 권 더 썼어. 논픽션도 여섯∼일곱 권 분량이 되고. 나도 놀랄 정도야.”

―돌아가시면 다 끝인데 작품은 남겨서 뭐 하나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면 다 허무해지는 거야. 오래 살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거밖에 더 돼? 산다는 건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얘기 아닌가. 개별적인 모든 삶은 다 소중해. 하지만… 생물학적 진화의 맥락에서 보면 아무리 특출한 사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40억 년 동안 이어진 지구 생태계 역사에서 겨우 몇십 년 사는 존재가 무슨 뜻을 얼마나 가질 수 있겠어. 사람이든 다른 종이든 개별적 개체는 별 뜻이 없어. 셰익스피어가 없었어도 뒤에 누군가가 비슷한 작품들을 썼을 거고 갈릴레오나 뉴턴이 없었어도 누군가가 그 업적을 대신 이뤘을 거야. 경제도 비슷해. 제너럴 모터스(미국 자동차회사)가 가고 제조공장 하나 없는 애플이 나오잖아. 중요한 건 시장(생태계)이지 개별 기업(개체)이 아니라고.”

그가 목이 마른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삶이 생물학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허무하잖아.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삶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이 중요성을 극대화해 행동하도록 진화했어. ‘나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야 이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니까 말이야. 개별적 개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물학적 사실과 ‘나라는 존재는 특별하다’는 이 실존의 부조화가 빚어낸 틈새, 이걸 메우는 게 바로 종교지. 나는 신(神)과도 통하는 특별한 존재이고 내세가 있고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허무해지지 않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는 지식인들은 지식이 늘어날수록 세상을 뚜렷하게 보게 되고 그럴수록 허무감이 커져. 그래서 나중에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많아. 그런데 나 같은 놈은 재수가 없어서 그것조차 안 돼(웃음). 그래서 결국 절망을 택했지. 절망이 가장 스테이블(stable·안정적)한 상태거든.”

―절망이 스테이블하다고요?

“과학이 내놓은 증거들이 너무 확실하니 종교에 기대지 못하는 나 같은 불운한 사람에게 절망은 가장 확실한 평정을 줄 수 있다고. 희망엔 불안이 따르는 법이니까 말이야. 나도 남은 날들이 점점 소중해지고 다가오는 죽음이 끔찍하긴 하지만 희망이 없어 기댈 곳도 없다 생각하니 오히려 맘이 편해.”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지만 기자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투철하고 해박한 선생께서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하신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운이 좋으면 간단하게 끝날 수도 있어. 기적적으로 말이야. 근데 암을 치료하면 몸을 안 상할 수가 없어. 단편 작가나 시인이라면 또 모를까, 나는 어쩌다 보니 소설을 택했어. 장편 한 번 쓰려면 전투 임하는 기분으로 나간다고. 한번 시작하면 얼마 걸릴지도 몰라. 짧으면 3개월? (소설가) 최인호 선생같이 재주 많은 사람도 결국 얼마 못 쓰다 가셨다고. 오죽 쓰고 싶었으면 골무를 끼고 썼겠나. 그 이야기 들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어. 그게 작가야. 나는 약아서(웃음), 아예 치료 안 받기로 한 거지.”

―어떤 분들은 아예 시골로 가서 식이요법 하면서 완치한 경우도 있다던데요.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해서 낫는다는 자기 최면, 믿음도 있어야지. 난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경제학은 항상 주어진 조건하에서 최적화를 하는 거야. 병은 주어진 조건이고 그럴 때 최적화가 뭐야?”

이 대목에서 기자가 “암에도 경제학을 들이대시니 정말 못 말리겠다” 하자 그는 “내가 재능이 하나 있는데 쉬운 일을 아주 어렵게 하는 데 도사”라고 말하며 다시 크게 웃었다.

암이라는 조건에서 최적화로 살기

―죽음에 이토록 태연하니 도사는 도사인 거 같으세요. 정말 두렵지 않으세요?

“한 달포 고생했지. 진단받고 온 날 나도 정신이 없잖아. 매일 잠들기 전에 릴랙싱(relaxing)하려고 탐정소설을 읽어. 그날도 읽고 누웠는데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는 거야. 너무 답답해 결국 잠을 못 이루고 일어나 마루를 서성대면서 생각했지. 암 진단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심리적 쇼크로 말이야.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골똘히 생각했지. 그러면서 몸이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해하기로 했어. 육체가 충격을 받았는데 정신에도 부조화가 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어느 날인가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는데 앞집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더라고. 갑자기 부모님 산소 생각도 나고 나도 몰래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거야. 그날 자리에 누워 동시(童詩) 비슷한 걸 하나 썼어. 이후 가슴 통증이 서서히 사라지더군. 마치 주술이라도 풀린 것처럼 말이야. 한동안 소설 쓴다고 시를 못 썼거든. 그런데 시가 나오는 거야. 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시(戀詩)를 잘 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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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Main/3/all/20140331/62125439/1
요기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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