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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를 살린 고집, 소니를 죽인 고집

2013.01.22 06:51

이규 조회 수:3633

 

소니를 몰락시킨 주범은 소니를 키운 ‘고집’이다. 예상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자 장인정신으로 평가받던 고집은 곧 발목을 잡는 장애물로 변해버렸다. 소니 몰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쓸데없는 독자규격 고집’을 꼽는 의견도 있을 정도다.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말 중 ‘갈라파고스화’라는 말이 있다. 갈라파고스는 다윈이 진화론의 기초 아이디어를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섬으로 독특한 생태계로 유명하다. 이 갈라파고스 섬에 빗대어 한 국가의 경제나 기술이 세계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산업이나 기술 생태계의 고립이 심해지는 현상을 갈라파고스화(化), 또는 갈라파고스 신드롬(Galapagos Syndrome)이라 한다. 얼핏 보면 언론에서 만들어 낸 조어 같지만, 국제사회 표준과는 다른 독자 규격을 사용한 탓에 자국 외 해외 시장에서 제품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 현상을 일컫는 경제학 용어다.

사실 이 단어가 등장하기 전에도 여러 곳에서 갈라파고스화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자동차 시장. 미국은 유가가 낮고 석유 회사의 로비력이 강한 데다 극단적으로 자동차 중심의 교통시스템을 보유하여 SUV에 대한 수요가 유독 컸다. 경제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동안은 SUV 차량이 문제가 되지 않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들어 국제 유가가 급상승하자 연비가 낮은 SUV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유독 SUV에 집중해 온 미국의 자동차 3사(GM, 포드, 시보레)는 토요타나 현대에 밀려 급격히 경쟁력을 상실한다. 프랑스는 정부 차원에서 야심 차게 추진했던 미니텔 덕분에 인터넷 도입이 늦춰졌으며 한국은 ActiveX를 비롯한 비표준 기술이 웹 환경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해외 웹사이트나 최신 인터넷 브라우저와의 호환성에 문제가 많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갈라파고스화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는 것은 일본이다. 일본의 갈라파고스화를 비꼬아 ‘잘라파고스(Japan+Galapagos)’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다. 휴대전화 시장만 해도 일본 기업들은 충분한 기술력을 보유했음에도 기존의 피처폰에 이런저런 기능을 붙이는 식으로 발전되어온 터라 스마트폰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장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일본의 절대적인 강세라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산업도 예전 같지 않다.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덕분에 보편성과는 거리가 먼, 독특한 취향의 소수 소비자 집단이 압도적인 구매력으로 시장을 좌우하는 일이 종종 있다 보니 게임과 애니메이션도 이들의 취향에 맞추느라 국제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잃는 추세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회사인 소니는 창의성을 중시한 경영이념과 기술력에 힘입어 워크맨을 히트시킨 이래, 음향기기, 방송장비부터 TV 등 디스플레이, 플레이스테이션 등 게임기, 노트북, 음반까지 성공적으로 사업을 확장해왔다. 20년 전만 해도 삼성이 소니의 대표 제품인 ‘트리니트론 브라운관’을 자사 제품에 도입하려 안달복달하며 매달려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니가 ‘하드웨어의 발전은 끝났다’고 선언하면서 콘텐츠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전자제품 분야는 한 수 아래로만 여겨졌던 삼성과 LG에 추월당하고 콘텐츠 산업은 콘텐츠 산업대로 실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결국, 엔고와 가격, 기술 경쟁력 저하라는 악재가 겹쳐 2012년 11월 말, 국제 신용평가사가 피치가 소니의 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정크)으로까지 강등해버렸다. 당연히 주가와 시가총액은 급전직하. 피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고급 가전제품의 대명사이자 혁신기업의 자리를 오랫동안 점유해왔던 소니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몰락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소니를 몰락시킨 주범은 소니를 키운 ‘고집’이다. 지금이야 애플이 단순하고 깔끔한 사각형 디자인에 특유의 전원 포트, 완고한 앱스토어 정책 등 고집이 강한 기업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전성기의 소니는 이보다 더했다. 소니가 혁신의 대명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고집스럽게 계획을 추진해 나갔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의 소니는 두 수 앞을 내다보는 회사였다. 애플의 성공신화를 견인한 통합멀티미디어 생태계, 아이튠스를 소니는 이미 1980년대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는 브라운관 시대를 평정한 트리니트론 기술이 있음에도 LCD 시대를 넘어서서 OLED를 겨냥했다.

자연히 소니의 고집은 아집이 아닌 최상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장인정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예상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자 고집은 곧 발목을 잡는 장애물로 변해버렸다. 절대적인 품질 우위와 자신만의 철학을 고수하는 것이 한때는 매력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지만, 소비자는 구매할 때 상대적 상품성을 따진다. 소니가 1989년 콜롬비아픽처스와 트라이스타픽처스를 인수하고 CBS와 에픽 레코드를 인수하며 ‘콘텐츠가 힘이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나름 방향을 잘 잡았었다. 문제는 소비자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 조성보다 품질 우선을 내세워 고품질 상품을 생산하는 데 주력했다는 점이다. 소니의 이러한 경향은 클래식 시장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고전음악을 팔아 온 소니뮤직의 행보나 지나치게 높은 가격으로 외면당한 ‘퀄리아’ 브랜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장 상황과 맞지 않는 고집은 기껏 잘 개발해 놓은 기술마저 사장할 수 있다. 기능적으로 우월한 기술이 시장의 흐름과 맞지 않아 버려지는 사례는 숱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소니가 이러한 사례를 유독 많이 보유하고 있다. 소니 몰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쓸데없는 독자규격 고집’을 꼽는 의견도 있을 정도다.

이미 VHS에 국제 표준을 빼앗기고 사장된 베타맥스나 CD와 MP3 플레이어의 과도기에 음반대여시장이라는 일본의 특수성을 파고들었다가 반짝 성공하고는 단명한 MD의 사례는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소니가 그나마 잘 나가는 게임 분야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UMD(Universal Media Disc). PSP(Playstation Portable)에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된 매체다. 재미있는 점은 휴대용 게임기의 저장매체로 광저장매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초기 PSP는 UMD를 통해서만 게임을 유통했으며 최대 1.8GB까지 저장할 수 있어 당시로써는 나름 넉넉한 편이었다.

출시 초기 소니는 나름 UMD를 새로운 표준으로 밀어줄 야망이 있었다. 이미 CD와 플로피디스크의 표준화 과정에서 성공한 경험이 있고 똑같은 광저장매체로서 DVD보다 한 세대 앞선 기술이 들어갔으며 휴대도 간편한 UMD가 히트하지 못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나 플래시 메모리의 가격 하락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는 것이 문제였다. UMD는 CD나 DVD와 비교하면 휴대용 장치에 사용하기에 분명 여러 장점이 있었지만 플래시 메모리 가격이 UMD와 동일 용량에서도 더 저렴해지자 곧 시장의 외면을 받고 말았다. 광학 저장매체의 편리함과 함께 모터 가동 때문인 전력소모, 제한된 렌즈 수명, 느린 읽기 속도 등의 단점도 고스란히 갖고 있었던 탓이다.

안타깝게도 소니는 이러한 상황을 이미 MD에서 겪은 바 있었다. 당시 MD는 휴대성이나 디자인, 음질, 편의성 면에서 카세트테이프나 CD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MD 플레이어와 비슷한 가격의 MP3 플레이어의 용량도 고작 128MB에 지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틈새를 공략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플래시 메모리 가격이 급격히 내려가자 용량 제한도 크고 녹음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MD는 인기가 떨어졌다. 소니는 자신의 광학 기술을 믿고 MD 확산에 열을 올렸지만, CD보다 입지가 훨씬 좁은 MD 규격이 설 자리는 이미 없었다. 결국, 소니는 MD 생산을 중단하고 2009년 출시된 최신형 PSP에서는 UMD를 아예 빼버리고 만다. 사실상 플래시 메모리에 대한 광학저장매체의 항복 선언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소니가 독자 표준에 집착하는 버릇을 버렸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다른 기업들이 SD(Secure Digital memory) 카드를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플래시 메모리 시대를 대비하고 있을 때 소니도 대비하고 있기는 했다. 물론 전혀 다른 방식으로.

파나소닉과 샌디스크, 도시바가 SD카드를 한창 개발 중이던 1998년, 소니는 한발 앞서 비슷한 형식의 제품인 ‘메모리스틱’을 내놓았다. 개념상 CF 카드의 발전형이었던 메모리스틱은 휴대성이나 편의성, 속도 등이 월등히 개선됐다. 메모리스틱의 성능에 고무된 소니는 자사의 디지털카메라와 캠코더, 노트북의 저장매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메모리스틱을 혼자 개발하고 혼자 사용하면서 관련 표준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연히 2000년 이전까지 메모리스틱의 규격이나 표준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기술을 ‘노하우’ 차원에서 관리하여 공개보다는 기밀유지에 중점을 둔 정책도 한몫했다. 자연히 메모리스틱은 소니만 생산하여 소니 기기에만 사용하는 소니만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 사이 SD 카드는 표준이 확립되어 초기 개발에 참여한 기업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기의 저장매체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결국, 소니는 2010년부터 자사의 디지털카메라에 SD 카드를 사용하여 메모리스틱을 포기하고 만다.


소니의 고집은 나름 자존심의 발로였겠지만 소비자에게는 고통이기도 했다. 메모리스틱만 하더라도 소니 제품이 아닌 기기에서는 읽어드릴 수도 없거니와 메모리스틱만 지원하는 소니 기기도 많아 데이터를 자유로이 옮기기 어려웠다. 게다가 수확 체증의 법칙에 따라서 SD카드와 비교했을 때 같은 성능인데도 터무니없이 비싼 경우가 많았다.

소비자의 편의성이나 의사가 중요한 소비재 시장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소니는 방송 관련 음향과 영상기기 분야에서는 강자로 남아있다. 호환성보다는 기기의 성능에 영향을 주는 음향분석과 처리 기술이나 영상처리에는 소니의 고집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덕분이다. 시장에 살아남은 쪽만 우월한 기술인 것은 아니겠지만, 시장에서 사라진 기술은 선택받지 못한 기술인 것은 확실하다. 선택받지 못한 기술은 더 이상의 발전의 기회를 잡지 못한다. 진화론은 기술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소니가 놓친 부분은 바로 이 원리, 특출한 개체가 아닌 최적의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원리다.

 


글. 김택원 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