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山北斗 | 클 | 뫼 | 북녘 | 말 | 泰山과 북두칠성을 우러러 보는 것처럼 사람을 존경함 |
태 | 산 | 북 | 두 | ||
唐宋八大家의 제1인자이며 唐의 4대 詩人(李太白, 杜甫, 白樂天과 함께) 중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를 두고 이른 데서 말이다. 韓愈는 두살 때 孤兒가 되었으나 刻苦의 勞力 끝에 25세에 進士ㄹ로 , 다시 감찰어사(監察御使), 중서사인(中書舍人),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경조윤(京兆尹) 겸 어사대부(御使大部)에 까지 이르렀다. 그가 죽은 後 朝廷에서는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증(贈)하고 시호(諡號)를 문(文)이라 하였다. 그가 官職에 在任시에는 宮中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弊端을 上訴하여 皇帝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다. 논불골표(論佛骨表)라 하여, 皇帝가 佛敎에 深醉하여 宮中내에서 佛供을 드리고, 각 地方 寺刹에 글을 보낸 사건이 있었는데, 韓愈는 皇帝의 이러한 일을 問題삼아 諫하였다. “佛敎는 邪敎이며, 佛骨같은 것은 水火에 던져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韓愈의 上訴에 憤怒한 皇帝는 그를 결국 귀양보내고 만다. 韓愈는 文章의 模範을 앞선 秦에서 구하고, 六朝 이래의 四六 변려(변려)의 숙폐(宿弊)를 打破하려 하였다. [唐書] 韓愈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唐이 일어난 이래 韓愈는 육경(詩, 書, 易, 春秋, 禮記, 樂記)의 글을 가지고 모든 學者들의 導師가 되었다. 그의 死後 그 學이 점점 隆盛하여 學者들은 그를 泰山北斗를 우러러 보는 것같이 尊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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