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機一髮 | 위태로울 | 기틀 | 한 | 터럭 | 위태로움이 매우 절박함 |
위 | 기 | 일 | 발 | ||
당(唐)의 한유(韓愈)가 살았던 때에는 佛敎가 盛行했다.同時代에 該當하는우리의 三國時代에 우리나라에서 佛敎가 盛行했던 것도 이와 無關하지 않다. 그러나 孔子의 後繼者라고 自處했던 韓愈는 이같은 狀況을 도저히 黙過할 수 없었다.그에게 佛敎는 「打倒」의 對象일 뿐이었다.하지만 當時 헌종(憲宗)은 열렬한 佛敎 信奉者였다.한번은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宮에 모셔다 놓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잔치를 擧國的으로 벌이게 되었다.이 때문에 民弊가이만저만이 아니었다.그렇지 않아도 佛敎를 反對했던 韓愈로서는 죽은 부처의 「뼈」를,그것도 神聖不可侵의 宮闕에 모셔 놓고 祭祀를 벌인다는 것은 想像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卽時 上訴했다.감히 天子에게 대든 것이다.그것도 不足해 佛敎를 신랄(辛辣)히 批判했다.그의 過激한 言辭는 憲宗을 激憤케 했고,마침내 참형(斬刑)이 내려졌다.그러나 大臣들의 도움으로 執行은 면하고 潮州(현 廣東일대)로 귀양가게 되었다. 潮州에서 그는 스님과 사귀면서 가깝게 지냈다.이 바람에 韓愈가 佛敎 信者가 되었다는 所聞이 돌았다.그러자 親舊이자 詩人인 맹교(孟郊)가 便紙를 써 事實 與否를 물어왔다.韓愈는 깜짝 놀랐다.그는 卽時 回信을 써 仔細한 內幕을 밝힘과 同時에 이번에도 朝廷과 佛敎를 싸잡아 辛辣히 批判했다.『佛敎 때문에 現在의 나라꼴은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으며 社稷의 危殆로움은 마치 머리털 한가닥에 매달린 千斤의 쇳덩이와 같소(一髮千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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